2009년 10월 19일
내가 조선의 국모를 죽였다 10 - 明暗
지난 편에 이어서
개국 504년 5월 11일, 군부대신으로 임명된 신기선이 부임을 하지 않는 사태가 발생했다. 신기선이 하필 이때 부모상을 당하여 관직에 나아가지 못하였던 것이다.1) 군부대신 자리를 공석으로 비워둘 수는 없는 노릇이라, 결국 차관에 해당하는 군부협판 이주회가 군부대신 서리로 임명되어 사무를 대신하게 되었다.2) 이리하여 이주회는 수개월 만에 금오도 도사에서 군부 경리국장, 군부협판이 되더니 급기야는 대신 서리에까지 올랐다. 국가 개혁의 야심찬 뜻을 품고 있었을 이주회로서는 절호의 기회를 맞은 셈이었다.
내가 조선의 국모를 죽였다 10
- 明暗
耿君이 삼가 지음
그리고 그 후 조선에서는 '군부대신 서리 이주회'의 서명을 단 군부 관련 각종 칙령들이 국왕의 재가를 받아 선포되었으니, 그 내역은 아래와 같다. (괄호 안은 반포 일자)
1895년 당시 조선에서는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기존의 군사, 경찰제도를 혁파하고, 군부와 육군의 체계를 정리하며 훈련대를 창설하는 등 각종 개혁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한 시기에 이주회가 군부대신의 자격으로 각종 군사 개혁 관련 칙령에 서명을 올리고 있으며, 훈련대 조직 및 군제 편성에 있어 주요한 역할을 행하였던 것이다. 물론 이주회가 낙하산 인사로서 어쩌다보니 군부대신 서리가 되어, 사실 꼭두각시로서 이름만 빌려주고 있을 뿐이었고, 그가 주도적으로 무슨 개혁을 시행하려 한 것은 아니라고 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주회 본인도 "어떻게든 해서 조선의 육군을 쓸모 있는 것으로 만들고 싶다"4)면서 '나름대로' 군제 개혁에 대한 포부를 갖고 있었다.
이주회가 군부대신 서리로 있을 때 훈련대(訓練隊)와 관련된 칙령 두 개가 반포되고 있는데, 칙령 91호 훈련대 사관 양성소 관제에 의해 훈련대 사관 양성소가 설치되어 교관으로 일본인들이 초빙되었다. 훈련대란 고종 32년(1895) 1월 17일, 이노우에 가오루 일본공사가 근위병 설치를 고종에 건의하면서, 그해 2월 12일에 1개 대대 규모로 설치된 군대5)인데, 이후 3개 대대로 증편되어 한성, 평양 등에 배치되었다. 훈련대 창설을 건의한 이노우에가 바로 이주회를 박영효에 추천한 그 이노우에이다. 그리고 박정양, 박영효 등은 이 훈련대를 고종의 호위로 삼아, 당시 러시아와 손을 잡고 있던 민비 및 친러 세력의 접근을 저지하려 했다. 한편 이주회는 훈련대 사관 양성소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을까? 오사키 마사요시가 남긴 글을 통해 그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유배 시절 일본의 발달한 산업과 강력한 군대를 관찰하였고, 일본의 지사들과 친분을 쌓고 있던 이주회는 훈련대의 교관으로 일본인을 초빙하는 것을 찬성하였음은 물론, 여타 군대들의 교관도 일본인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해야만 조선 군대의 쇄신이 충분히 이루어질 수 있다고 그는 생각하였던 것이다. 이주회의 그러한 생각은 조선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을 키우려는 이노우에의 생각, 그리고 일본과의 연계를 통해 개혁을 추진하고 민비 세력을 견제하려는 박영효 등의 생각과 맞아떨어졌으리라.
하지만 밝을 것 같기만 한 이주회의 행보에 어둠이 드리우게 되었다. 윤5월 9일, 상중으로 인해 군부대신 직에 나오지 못하고 있던 신기선이 묵최(墨衰)를 입고 군사 직책을 수행하게 할 것을 청하고, 이에 대해 고종이 '번거롭게 굴지 말고 어서 들어와서 칙명을 받으라'고 하였다.7) 이에 신기선이 칙명을 받고 군부대신에 취임하였고, 이주회는 자연스럽게 군부대신 서리 직에서 해임되었다.8) 군부협판으로 돌아온 이주회는 여전히 개혁 추진에 힘쓰려고 하였지만, 일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훗날 이주회는 다케다 한시를 만나 군부협판으로 있던 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다.
황현의 『매천야록』에서도 이주회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인식 내지 평판을 살펴볼 수 있다.
이처럼 이주회는 본디 금오도 촌구석의 인사이면서, '왜인과 가까이 지내'고, 박영효의 힘을 등에 업음으로 인해 군부협판까지 올라온 낙하산 인사가 된 사람으로 세간에 알려졌고, 그만큼 동료 관리들의 괄시를 받았던 것이다. 게다가 윤5월 16일에는 박영효가 반역을 꾀하였다는 혐의를 받고 법부(法部)의 심문을 받게 되었다.11) 박영효는 다시 일본으로 망명하면서 자신의 무고함을 호소했으나, 고종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12)
상황이 이렇게 되자 결국 이주회는 음5월 21일 사표를 내고, 취임한 지 한 달 남짓 만에 군부협판 직에서 물러났다.13) 이후 다케다 한시는 오사키 마사요시와 함께 이주회를 찾아갔는데, 이주회는 사표를 낼 당시의 일을 다음과 같이 술회하였다.
다음 편에 계속
== 주석 ==
1) 『고종실록』 고종 32년 윤5월 6일조.
2) 『고종시대사』 3, p.867.
3) 칙령들의 명칭 및 반포 일자 등에 대해서는 『고종실록』 고종 32년 5월, 윤5월조 참조.
4) 『義人李周會氏法要及事蹟』, pp.21-22.
5) 훈련대에 관해서는 『브리태니커 세계 대백과사전』 '훈련대' 항목을 참조.
6) 『義人李周會氏法要及事蹟』, pp.22-23.
7) 주석 1과 같음.
8) 『고종시대사』 3, p.902.
9) 『고종실록』 고종 32년 윤5월 16일조.
10) 『역주 매천야록』 상, pp.443-444.
11) 주석 4와 같음.
12) 『브리태니커 세계 대백과사전』 '박영효' 항목.
13) 『고종시대사』 3, p.917.
14) 『義人李周會氏法要及事蹟』, p.22.
개국 504년 5월 11일, 군부대신으로 임명된 신기선이 부임을 하지 않는 사태가 발생했다. 신기선이 하필 이때 부모상을 당하여 관직에 나아가지 못하였던 것이다.1) 군부대신 자리를 공석으로 비워둘 수는 없는 노릇이라, 결국 차관에 해당하는 군부협판 이주회가 군부대신 서리로 임명되어 사무를 대신하게 되었다.2) 이리하여 이주회는 수개월 만에 금오도 도사에서 군부 경리국장, 군부협판이 되더니 급기야는 대신 서리에까지 올랐다. 국가 개혁의 야심찬 뜻을 품고 있었을 이주회로서는 절호의 기회를 맞은 셈이었다.
내가 조선의 국모를 죽였다 10
- 明暗
耿君이 삼가 지음
그리고 그 후 조선에서는 '군부대신 서리 이주회'의 서명을 단 군부 관련 각종 칙령들이 국왕의 재가를 받아 선포되었으니, 그 내역은 아래와 같다. (괄호 안은 반포 일자)
칙령 제90호 「육군 무관 진급령」 (5월 16일)
칙령 제91호 「훈련대 사관 양성소 관제」 (5월 16일)
칙령 제96호 「훈련대 하사 병졸 급료 소관 건」 (5월 20일)
칙령 제107호 「신설대 편제 소관 건」 (5월 21일)
칙령 제108호 「신설대 장졸 급료 소관 건」 (5월 21일)
칙령 제110호 「군기 등 관사 관건(軍器等管査關件)」 (윤5월 3일)3)
1895년 당시 조선에서는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기존의 군사, 경찰제도를 혁파하고, 군부와 육군의 체계를 정리하며 훈련대를 창설하는 등 각종 개혁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한 시기에 이주회가 군부대신의 자격으로 각종 군사 개혁 관련 칙령에 서명을 올리고 있으며, 훈련대 조직 및 군제 편성에 있어 주요한 역할을 행하였던 것이다. 물론 이주회가 낙하산 인사로서 어쩌다보니 군부대신 서리가 되어, 사실 꼭두각시로서 이름만 빌려주고 있을 뿐이었고, 그가 주도적으로 무슨 개혁을 시행하려 한 것은 아니라고 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주회 본인도 "어떻게든 해서 조선의 육군을 쓸모 있는 것으로 만들고 싶다"4)면서 '나름대로' 군제 개혁에 대한 포부를 갖고 있었다.
이주회가 군부대신 서리로 있을 때 훈련대(訓練隊)와 관련된 칙령 두 개가 반포되고 있는데, 칙령 91호 훈련대 사관 양성소 관제에 의해 훈련대 사관 양성소가 설치되어 교관으로 일본인들이 초빙되었다. 훈련대란 고종 32년(1895) 1월 17일, 이노우에 가오루 일본공사가 근위병 설치를 고종에 건의하면서, 그해 2월 12일에 1개 대대 규모로 설치된 군대5)인데, 이후 3개 대대로 증편되어 한성, 평양 등에 배치되었다. 훈련대 창설을 건의한 이노우에가 바로 이주회를 박영효에 추천한 그 이노우에이다. 그리고 박정양, 박영효 등은 이 훈련대를 고종의 호위로 삼아, 당시 러시아와 손을 잡고 있던 민비 및 친러 세력의 접근을 저지하려 했다. 한편 이주회는 훈련대 사관 양성소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을까? 오사키 마사요시가 남긴 글을 통해 그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지금 육군은 어떤 상황에 있습니까? 일본으로부터 사관이 와서 양성 임무를 맡고 있는데, 그건 어떤 분위기입니까?"라고 말한 것을 들었습니다만, 이주회 씨가 말하시는 바로는 "그것은 일본으로부터 와서 교양의 임무를 맡아주시는 사관 분들은, 실로 성실하게 일해주어서, 병사 부대들도 기뻐하고 있고, 또한 사관들도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훈련대 만의 일인데, 한편 일본의 근위병이라고 할 수 있는 친위대 쪽에서는, 오늘날 또 미국인이 양성에 위임되어 있으므로, 이래서는 육군의 쇄신 따위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므로, 그것을 몽땅 바꿈과 동시에, 이 친위대까지도 일본 사관의 손에 의해 양성시켜야 한다는 의견을 나는 갖고 있고, 또 국왕께도 그 일을 말씀드렸습니다."고 하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6)
유배 시절 일본의 발달한 산업과 강력한 군대를 관찰하였고, 일본의 지사들과 친분을 쌓고 있던 이주회는 훈련대의 교관으로 일본인을 초빙하는 것을 찬성하였음은 물론, 여타 군대들의 교관도 일본인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해야만 조선 군대의 쇄신이 충분히 이루어질 수 있다고 그는 생각하였던 것이다. 이주회의 그러한 생각은 조선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을 키우려는 이노우에의 생각, 그리고 일본과의 연계를 통해 개혁을 추진하고 민비 세력을 견제하려는 박영효 등의 생각과 맞아떨어졌으리라.
하지만 밝을 것 같기만 한 이주회의 행보에 어둠이 드리우게 되었다. 윤5월 9일, 상중으로 인해 군부대신 직에 나오지 못하고 있던 신기선이 묵최(墨衰)를 입고 군사 직책을 수행하게 할 것을 청하고, 이에 대해 고종이 '번거롭게 굴지 말고 어서 들어와서 칙명을 받으라'고 하였다.7) 이에 신기선이 칙명을 받고 군부대신에 취임하였고, 이주회는 자연스럽게 군부대신 서리 직에서 해임되었다.8) 군부협판으로 돌아온 이주회는 여전히 개혁 추진에 힘쓰려고 하였지만, 일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훗날 이주회는 다케다 한시를 만나 군부협판으로 있던 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다.
"…… (군부)협판의 직에 취임하여, 어떻게든 해서 조선의 육군을 쓸모 있는 것으로 만들고 싶다고 여러가지 고심을 하여, 그 일을 장관 및 기타 등등에게 말하였습니다만, 좀처럼 채용해주지 않습니다. 특히 궁중의 전횡이 심하여, 우리들이 말하는 것을 아무래도 써주지를 않습니다. 뭐라고 말을 하면 바로 '금오도의 촌놈이 뭘 아는가' 하고 말하는 것 같은 상태로 내 의견은 들어주지 않습니다. ……"9)
황현의 『매천야록』에서도 이주회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인식 내지 평판을 살펴볼 수 있다.
이주회는 …… 평소 왜인과 가까이 지내 그들에게 관직을 받아 10년 전에 가족을 다 이끌고 금오도(金鰲島)에 우거해 있었다. 동학란을 평정하는 데 공이 있었기 때문에 임금의 부름을 받아 높이 올랐으니 대개 박영효가 끌어들인 것이다.10)
이처럼 이주회는 본디 금오도 촌구석의 인사이면서, '왜인과 가까이 지내'고, 박영효의 힘을 등에 업음으로 인해 군부협판까지 올라온 낙하산 인사가 된 사람으로 세간에 알려졌고, 그만큼 동료 관리들의 괄시를 받았던 것이다. 게다가 윤5월 16일에는 박영효가 반역을 꾀하였다는 혐의를 받고 법부(法部)의 심문을 받게 되었다.11) 박영효는 다시 일본으로 망명하면서 자신의 무고함을 호소했으나, 고종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12)
상황이 이렇게 되자 결국 이주회는 음5월 21일 사표를 내고, 취임한 지 한 달 남짓 만에 군부협판 직에서 물러났다.13) 이후 다케다 한시는 오사키 마사요시와 함께 이주회를 찾아갔는데, 이주회는 사표를 낼 당시의 일을 다음과 같이 술회하였다.
"…… 나는 국난이 목전에 닥쳐오는 것을 차마 묵시할 수 없으므로, 어느 날...밤이었는지는 확실히 기억나지 않지만... 궁중에 나와서 국왕을 향하여 육군의 개혁과 기타 정치상에 있어서의 의견을 진술하였습니다만, 들어주시지는 않고 내게 물러가라고 말씀하시므로, 그래서 나는 죽음을 결의하고, '아무래도 우선 제 의견을 채용해주시기를 바랍니다' 하고 극력 간언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거듭 '속히 물러가라'고 말하시고, 그래도 나는 결코 물러나지 않았습니다. 왕은 마침내 시신(侍臣)에게 명하여 나를 건물 밖으로 내쫓아 버리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바로 사표를 내고, 이렇게 한산한 몸이 되어 있습니다."14)
耿君 識
다음 편에 계속
== 주석 ==
1) 『고종실록』 고종 32년 윤5월 6일조.
2) 『고종시대사』 3, p.867.
3) 칙령들의 명칭 및 반포 일자 등에 대해서는 『고종실록』 고종 32년 5월, 윤5월조 참조.
4) 『義人李周會氏法要及事蹟』, pp.21-22.
5) 훈련대에 관해서는 『브리태니커 세계 대백과사전』 '훈련대' 항목을 참조.
6) 『義人李周會氏法要及事蹟』, pp.22-23.
7) 주석 1과 같음.
8) 『고종시대사』 3, p.902.
9) 『고종실록』 고종 32년 윤5월 16일조.
10) 『역주 매천야록』 상, pp.443-444.
11) 주석 4와 같음.
12) 『브리태니커 세계 대백과사전』 '박영효' 항목.
13) 『고종시대사』 3, p.917.
14) 『義人李周會氏法要及事蹟』, p.22.
# by | 2009/10/19 17:27 | 아시아에서 길을 잃다 | 트랙백 | 핑백(2) | 덧글(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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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편에 이어서여기서 이주회의 행적을 되돌아보자. 그는 대원군의 눈에 들어 병인양요에서 활약하는 등 여러 관직을 거치게 되어 '대원군의 사람'으로 간주되기도 하였다. ... more
애국지사적인 풍모가 느껴지네요.
문제는 일본과의 관계인데, 이 시기의 친일 인사들을 일제강점기의 친일파들과
같다고 볼 수는 없을 것 같다고 생각은 하는데요...
이들은 아직 일본의 조선 병탄 의도를 파악하지 못했던 것인가요?
아님 알고서도 일본에 협조를 했던 것일까요?
이는 곧 국방력 약화를 의미하는 바, 기존의 보수적 관료들이 이를 우려하여 이주회의 의견에 신중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일본 군대의 근대화 실상을 잘아는 이주회였다면, 일본 군부의 첫 군사고문으로서 1차 타이완침공의 중요역할을 한 사람도 미국인이었는데, 마치 미국인이 양성에 위임되어있어 쇄신을 할 수 없다는 견강부회식의 애기라면, 순수한 지사적 의지가 처음에는 그래도 있었다고 하기보다 실제 다른 정치적 의도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니면 오사키 마사요시가 이주회가 그랬다고 하면서 나중에 당시의 일본측의 입장을 윤색한 것일 수도 있구요...차라리 고종이 시위대만 끼고 돌아서 (앙심을 품고) 개혁이 안된다고 했다면 오히려 이해가 될것도 같은데...
뭐 그런 생각이 불쑥 들었습니다... 계속 기대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