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조선의 국모를 죽였다 09 - 協辦

지난 편에 이어서

고종 재위 32년, 즉 개국 504년(1895) 4월 1일, 칙령 제38호 내각관제, 제39호 내각소속직원관제, 그리고 제55호 군부관제 기타 등등에 의하여 내각의 관리들이 임명되었다. 내각총리대신으로는 김홍집(金弘集)이 유임되었고, 군부대신 조희연(趙羲淵) 또한 자리를 지켰으며, 군부협판에는 권재형(權在衡)이 임명되었다.

그리고 이주회는 이때 군부 경리국장(經理局長)의 자리에 앉게 되었다.1)

내가 조선의 국모를 죽였다 09
- 協辦

耿君이 삼가 지음


구로오카와 이노우에가 추천한 이주회는 박영효에 의해 발탁되어 중앙 관직에 오르게 되었다. 일본에서 망명할 당시만 해도 외딴 섬으로 가 개척을 하겠다며 유배나 다름없는 생활을 자청했던 이주회가 다시 조정으로 돌아온 것은 왜일까? 아마도 동학농민군의 봉기, 그리고 뜻을 같이한 벗 김옥균의 죽음 등이 그에게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민란이 발생하고 외세가 침입해오는 혼란하고 위태로운 상황 속에서, 민씨 일당을 축출하고 국가의 정치 개혁을 행하려 했던 친구가 세상을 떴으니, 이제 그 일을 내가 해야겠다는 사명감을 갖게 되었던 것 같다. 그는 군사적 재능을 인정받아 군부로 들어갔는데, 경리국장직에 임명된 것은 금오도 도사 시절에 상업을 행하고 재화를 다룬 경력에 의한 인사 조치인 듯하다.

다만 다케다 한시의 「기이풍영사」, 『의인 이주회 씨 법요 및 사적』, 『동아선각지사기전』에서는 이주회가 군부 경리국장으로 근무했던 사실을 전하지 않으며, 다만 이주회가 구로오카의 추천을 받고 이노우에의 알선에 의해 군부협판이 된 일을 적고 있다.

(구로오카 다테와키가) 나중에 경성에 도착하자 이(이주회의 일)를 이노우에 공사(가오루)에게 알렸다. 당시 박영효가 내무대신이었다. 장군(이주회)은 이에 따라 공으로써 일약 군부협판(군부차관)에 발탁되었다.
─ 『의인 이주회 씨 법요 및 사적』, p.2.

그때 이주회 씨와 다케다 (한시) 씨의 필담을 곁에서 보고 있으니, "저도 이노우에 공사의 알선하심에 의해, 군부협판까지 되었는데, 이제 협판의 직에 올라, ……"
─ 『의인 이주회 씨 법요 및 사적』, p.21.

봄 여름 사이에 공으로써 군부협판에 발탁되었다.
─ 「기이풍영사」, 『의인 이주회 씨 법요 및 사적』, p.44.

이러한 사정은 다른 기록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을미년(1895) 5월] 신기선(申箕善)을 기복(起復)시켜 군부 대신으로 임명하고 서재필(徐載弼)을 외부 협판, 윤치호(尹致昊)를 학부 협판, 이주회(李周會)를 군부 협판으로 임명하였다. …… 이주회는 서울 사람으로 본명은 풍영(豊泳)인데, 평소 왜인과 가까이 지내 그들에게 관직을 받아 10년 전에 가족을 다 이끌고 금오도(金鰲島)에 우거해 있었다. 동학란을 평정하는 데 공이 있었기 때문에 임금의 부름을 받아 높이 올랐으니 대개 박영효가 끌어들인 것이다.
─ 황현 지음, 임형택 외 옮김, 『역주 매천야록』 상, 문학과지성사, 2005, pp.443-444.

그래서인지 『실록 친일파』, 『친일파 99인』에서도 '해군함장 구로오까가 이노우에 공사에게 천거해서, 그 입김으로'2) 군부협판이 되었다거나, '함장 구로오카가 이노우에 주한공사에게 천거하고, 다시 이노우에가 박영효 내무대신에게 압력을 넣어 …… 군부협판에 파격적으로 발탁되었다'3)는 서술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앞서도 언급하였듯, 이주회는 개국 504년 5월에 군부협판이 되기 이전에 이미 군부 경리국장 직을 맡고 있으므로, 느닷없는 낙하산 인사로 군부협판이 된 것은 아니었다. 아, 물론 군부 경리국장에 임명된 것은 갑작스러운 인사였다고 할 수 있겠지만 말이다.

과연 박영효는 강창일 교수의 서술대로 이노우에의 '압력'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이주회를 발탁했던 것일까? 물론 이주회가 군부 경리국장이 되는 데에 있어서 이노우에의 추천이 크게 영향을 끼쳤던 것은 당연한 일이겠으나, 일찍이 중앙 관직에 몸담은 바 있고 김옥균과도 친분이 있던 이주회에 대해 박영효도 조금은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이주회가 경리국장을 거쳐 협판에까지 이르는 데에는 약간 복잡한 사정이 존재한다.

당시 내무대신 박영효는 내각총리대신 김홍집, 내각총서 유길준과 조정의 권력을 놓고 대립구도를 펴고 있었다. 결국 권력다툼 끝에 김홍집은 5월 5일 총리직을 사직하였고, 5월 8일에 학부대신 박정양(朴定陽)이 새 내각총리대신이 되었다. 이때 외부협판 이완용(李完用)은 유길준에게 접근하여 학부대신의 자리를 얻고, 유길준과 결탁하여 박영효를 압박하려고 하였다. 박영효는 이에 유길준을 내부협판에 임명하여 오히려 그와 합세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유길준은 박영효의 밑에 있게 된 것을 부끄러워 하며 그를 밀어내려고 마음먹었다고 한다.4) 이런 상황 속에서 박영효는 내각 내에 자기 편을 심어놓는 일의 일환으로서, 일찍이 자신이 관계(官界)에 꽂아주었던 이주회를 자기 라인의 사람으로서 차관급 인사로 밀어준 것이 아니었을까.

개국 504년 5월 10일, 이완용은 학부대신에, 유길준은 내무협판에 임명되었고, 신기선(申箕善)은 육군 부장 겸 군부대신이 되었으며, 군부협판이던 권재형이 유길준의 후임으로서 내각총서가 되었다. 이때 내각총리대신 비서관이던 윤치호는 학부협판에, 서재필은 외부협판에 각각 임명되었다. 그리고 이때 이주회는 권재형의 후임으로 군부협판이 되었다.5)

그런데 5월 11일, 사태는 의외의 방향으로 전개된다.

耿君 識

다음 편에 계속

== 주석 ==
1) 『고종시대사』 3, pp.796-798.
2) 임종국, 『실록 친일파』, pp.42-43.
3) 강창일, 「이주회」, 『친일파 99인』1권, p.189.
4) 『대한계년사』 권2, p.93; 『고종실록』 고종 32년 5월 5일조, 5월 8일조.
5) 『고종시대사』 3, p.866.

by 耿君 | 2009/10/14 20:59 | 아시아에서 길을 잃다 | 트랙백 | 핑백(2) | 덧글(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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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nked at 耿君春秋 : 내가 조선의 국모.. at 2009/10/14 21:00

... 가 있었는데, 이노우에 가오루는 재야의 유현(遺賢)이라며 박영효에게 이주회를 추천하였던 것이다.10) 이주회의 인생에 새로운 전기(轉機)가 찾아오는 순간이었다. 耿君 識다음 편에 계속== 주석 ==1) 『義人李周會氏法要及事蹟』, p.44.2) 한국어 위키백과 '김옥균' 항목.3) 주석 1과 같음.4) 이와 관련된 내용에 대해서는 「갑오농민전쟁」, 『브 ... more

Linked at 耿君春秋 : 내가 조선의 국모.. at 2009/10/19 17:27

... 지난 편에 이어서개국 504년 5월 11일, 군부대신으로 임명된 신기선이 부임을 하지 않는 사태가 발생했다. 신기선이 하필 이때 부모상을 당하여 관직에 나아가지 못하였던 것이다. ... more

Commented by 한단인 at 2009/10/14 21:22
아.. 좋은 끊김이다..(응?)
Commented by 耿君 at 2009/10/14 22:08
임고 준비는 잘 되시는지요.
Commented by 한단인 at 2009/10/15 03:03
수면과 시간과의 싸움이죠. 밤 10시에 자빠져 자서 3시 전에 깨는 생활이라니... OTL

천연 잠보인 저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현실이지만 별수 없....
Commented by Allenait at 2009/10/14 22:00
이것이 독자들이 다음 시리즈를 궁금해하도록 하는 끊김이군요(?)

Commented by 耿君 at 2009/10/14 22:08
뭐 늘 이런 식으로 써왔기 때문에 ㅎ
Commented by 들꽃향기 at 2009/10/14 23:26
박영효와 유길준 등의 정치적 흐름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군요. 잘 읽고 갑니다. ^^
Commented by 耿君 at 2009/10/15 10:09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하고 추측해보았을 뿐입니다 ㅎ
Commented by 빼뽀네 at 2009/10/15 10:34
오늘도 흥미진진하게 잘 보고 갑니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는데요.
이 당시 내각 관료들의 결정권은 이미 고종에게서 떠나 있었나요?
Commented by 耿君 at 2009/10/15 11:31
갑오개혁 때 총리대신을 비롯한 각 대신들에게 관리 임용권이 주어졌고, 국왕의 많은 권한들이 축소되었다고 합니다.
Commented by 어릿광대 at 2009/10/15 14:51
박영효와 유길준 사이가 안좋았군요(응?)
Commented by 耿君 at 2009/10/15 21:31
갑신정변 무렵만 하더라도 개화파 사람들끼리 뭉쳐 있었지만,
갑오개혁 이후에는 성향에 따라 분열이 생기는 것 같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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