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07월 21일
흰 무지개, 해를 뚫다 07 - 임시외교조사위원회
지난 편에 이어서
마침내 1917년 4월 20일, 대망의 총선거 결과가 나왔다.
이로써 데라우치 내각은 헌정회를 여당 자리에서 몰아내고, '엄정중립'을 견지하는 암묵적 지지 기반인 정우회를 여당으로 만들 수 있었다. 그러는 한편, 정우회는 절대다수를 차지하지는 못하였기 때문에, 내각으로서는 정우회의 독단적 행동이나 태도의 변화를 견제할 수 있게 되었다.
흰 무지개, 해를 뚫다 07
- 임시외교조사위원회
耿君이 삼가 엮음
그리고 데라우치는 '임시외교조사위원회'를 창설함으로써 그토록 바라던 초연주의에 입각한 거국일치의 체제를 갖출 수 있게 되었다. 아래는 『원수 데라우치 백작전』에 나오는 임시외교조사위원회 설립 당시의 상황을 서술한 것이다.
어쨌든 데라우치 내각은 이로써 원하던 '거국일치'의 체제를 성립시킬 수 있었고, 이를 기반으로 하여 의도한 바대로 외교 문제 대응과 각종 정책의 시행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내각과 의회의 체제를 무시한 예외적이고 기형적인 기관의 설립은 소통의 부족을 낳았고, 데라우치 내각은 정책 시행의 효율성을 우선하여 독단적이고 은밀한 행동을 자주 행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일이 터지기 시작한다.
다음 편에 계속
마침내 1917년 4월 20일, 대망의 총선거 결과가 나왔다.
정우회 159명, 헌정회 120명, 국민당 36명, 중립 및 무소속 의원 66명이 되었다. 헌정회는 중의원에서 절대 다수의 권위를 잃었고 정우회는 예전 세력을 만회하여 다수정당이 될 수 있었으나, 중립당 66명의 향배는 능히 대세를 좌우할 수 있는 권위를 갖추는 결과가 되었다.
─ 黑田甲子郞, 『元帥寺內伯爵傳』, 元帥寺內伯爵傳記編纂所, 1920, p.861.
이로써 데라우치 내각은 헌정회를 여당 자리에서 몰아내고, '엄정중립'을 견지하는 암묵적 지지 기반인 정우회를 여당으로 만들 수 있었다. 그러는 한편, 정우회는 절대다수를 차지하지는 못하였기 때문에, 내각으로서는 정우회의 독단적 행동이나 태도의 변화를 견제할 수 있게 되었다.
흰 무지개, 해를 뚫다 07
- 임시외교조사위원회
耿君이 삼가 엮음
그리고 데라우치는 '임시외교조사위원회'를 창설함으로써 그토록 바라던 초연주의에 입각한 거국일치의 체제를 갖출 수 있게 되었다. 아래는 『원수 데라우치 백작전』에 나오는 임시외교조사위원회 설립 당시의 상황을 서술한 것이다.
이상의 시설 중 가장 중대한 것은 임시외교조사위원회의 창설로서, 이보다 앞선 전 내각 시대에 가토, 하라, 이누카이 세 정당의 수령들이 서로 회합하여, 외교 및 국방 문제를 정쟁 이외에 두고 협심 진력하여 국론을 통일하는 데에 노력할 것을 맹세하였다. 이는 실로 대외정책의 일대 진보로서, 우리 국민이 가장 희망하던 제국 백년의 장구한 계획이었다. 백작은 내각조직의 당초부터 거국일치를 이상으로 하고 세계 전쟁의 와중에 대처하는 국책으로서는, 분분한 정쟁 이외에 초월하여 국론을 통일하는 것이 가장 긴급하다고 느껴서, 2월 초순, 미국정부가 비로소 독일에 대해 국교 단절을 성명한 당시부터 마음 속으로 대외 정책의 통일을 생각하고 그 실현의 준비에 부심하셨다. 그렇지만 의회가 이미 해산되어 정당, 정파의 누구도 모두 각자의 선거구로 돌아가서, 한 뜻으로 축록전(逐鹿戰)에 광분(狂奔)할 때에 있어서는 각 당 수령이 이에 귀를 빌려줄 리 없어 마지못해 지지부진하게 총선거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총선거의 결과는 헌정회가 절대 다수의 권위를 잃고 정우회, 국민당이 다소의 세력을 증가한 형세가 되었으므로, 백작은 그가 이상으로 삼는 국론통일을 실행하는 데에는 절호의 기회라고 여겨, 5월 하순, 모토노 외상, 고토 내상 등과 내부 토의를 하여, 6월 1일, 사람을 보내 가토, 하라, 이누카이의 세 정당 수령에게 알리기를, '내일 2일 오전 10시 각위(各位)와 회견하여 일체의 성부(城府)를 거두고 제국의 외교 국시를 상의하려 한다, 바라건대 만장(萬障)을 배제하고 나오시라'고 하였다. 세 수령은 모두 이를 흔쾌히 승낙하였다. 이튿날인 2일, 가토 자작이 먼저 도착하였고, 약 5분을 지나 하라, 이누카이 두 사람이 또한 와서 모였다. 백작은 처음으로 지성(至誠)을 피력하고 안(案)을 갖추어 임시외교조사회 설치의 필요를 논하며 3당 수령이 해당 조사위원직을 수락할 것을 간청했는데, 하라, 이누카이 두 수령은 세계 대국 상으로 보아 당정 여하에 상관없이 바로 위원직을 수락하여 동의를 표했다. 가토 자작은 숙고의 유예를 요구하며 그 답변을 보류하여, 오전 11시에 수상 저택을 물러나왔다. 이튿날인 3일, 가토 자작은 뜻을 아직 결정하지 않고 급히 당의 영수들을 모아서 논의하였고, 그 결과 위원직을 사퇴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던 것 같다. 이튿날 4일, 백작은 사자를 보내 자작의 뜻을 살펴보게 했으나 아직 답이 없었다. 따라서 백작은 5일 오전중 다시 고다마[兒玉] 내각서기관장을 가토 자작의 사저에 보내 승낙, 거부의 즉답을 요구하였다. 가토 자작은 그를 접견하고 그 위원직을 사양하며 말하기를 "나는 위원직을 사양하지만, 일이 실로 국가의 대경(大經)에 속하는 이상 큰 일이 있을 때마다 수상의 요청에 응하여 비견(卑見)을 진술하는 것을 사양하지는 않소. 바라건대 돌아가서 이 말을 수상에게 전하시오"라 하였다. 그 심사는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다. 그렇지만 외교조사회는 당장 이날 관제로써 발포되려는 찰나에 즈음하여, 자작의 사적 약속 하나로 그것을 중단할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헌정회의 기관지는 이날 조간 신문에서 이미 재빨리 해당 관제(외교조사회)가 위헌임을 통렬히 논하여 집 위에 집을 짓는 일이라고 논박하였다. 형세가 이와 같으니 어찌 관대한 데라우치 백작이라 해도 자작의 한 마디 교묘한 말만을 신뢰할 수 있겠는가. 백작은 가토 자작이 위원직을 고사한 것을 자못 유감으로 생각하시면서도 이미 칙어가 내려진 이상 형세가 중지되어서는 안되므로, 예정된 순서를 거쳐 이날 임시외교조사위원회 관제를 발포하였다. 그 전문은 다음과 같다.가토 다카아키는 임시외교조사위원회 위원직을 제안받았지만, 내각 체계와 의회에서 벗어나 천황 직속의 별도 기관에서 일부 인사들의 논의로 외교 및 각종 사안을 논의하려는 데에 반대하여 위원직을 고사하였다. 하지만 데라우치 내각의 불신임안 제출의 장본인이던 이누카이 쓰요시는 결국 이 위원회의 위원으로 참여하게 되었다.짐이 시국의 확대를 거울삼고 영원한 이해(利害)를 고려하여 측근에 임시위원회를 특설하고 중외의 정세를 조사하여 응기계옥(應機啓沃)의 임무를 맡길 필요를 용인하여 임시외교조사위원회 관제를 재가하니 이에 그것을 공포시킨다.
제1조 궁중에 임시외교조사위원회를 설치하고 천황에 직속시켜 시국에 관한 중요 안건을 조사 심의하게 한다.
제2조 임시외교조사위원회는 총재 1명, 위원 약간명으로 조직한다.
제3조 총재는 내각총리대신으로 임명하고 위원은 내각총리대신, 국무대신, 혹은 국무대신 급의 전관 예우를 받는 자, 국무대신에 해당하는 자 또는 친임관 중에서 선발하여 칙명한다.
제4조 총재는 뜻을 받들어 위원을 총감독하고 의사를 정리하여 부주(敷奏)의 임무를 맡는다. 총재에게 사고가 났을 때는 수반 위원을 그 대리로 한다.
제5조 임시외교조사위원회에 간사장 1명, 간사 약간명을 둔다. 간사장은 위원 중에서 이를 겸하게 하고 위원회 사무를 정리하게 한다. 간사는 내각 및 외무성 고등관 그리고 육해군 장교 중에서 임명한다. 간사장의 지휘를 받아 위원회 사무를 관장하게 한다.
제6조 특별한 수요가 있는 경우에는 제3조의 규정에 구애받지 않고 학식과 경험이 있는 자를 임시위원으로 칙명한다.
제7조 위원의 대우는 관직을 갖고 있을 때는 그 관직에 맞는 대우에 의하고, 관직을 줄 때는 따로 정한다.
이튿날 친임식이 있어 임시외교조사위원회 관제 제3조에 의하여, 백작은 총재로, 모토노 외상, 고토 내상, 가토 해상, 오시마 육상, 히라타[平田], 이토[伊東] 두 자작, 하라 정우회 총재, 이누카이 국민당 총리는 위원에 친임되었고, 고다마 내각서기관장, 시데하라 외무차관 등은 간사에 임용되었다. 이후 대외문제를 당쟁의 희생으로 삼는 폐해를 벗어날 수 있게 된 것은 어쨌든 데라우치 내각의 하나의 성공 사례라 할 수 있겠다.
─ 黑田甲子郞, 『元帥寺內伯爵傳』, 元帥寺內伯爵傳記編纂所, 1920, pp.863-866.
정우회 하라 다카시, 국민당 이누카이 쓰요시는 참가를 승낙했으나, 헌정회의 가토 다카아키는, "외교에 관해서 국론의 일치를 기하는 것은 본디 희망해야 할 바이지만, 내각 이외에, 별도로 천황 직속의 기관을 설치하여 사실상 국무대신에게 간섭을 가할 우려가 있는 것 같음은, 보필의 임무를 엄명하게 하는 소이(所以)가 아니다"라고 하여 동조를 거부했다. 조사회 무용론을 주장한 도쿄 아사히 신문[東京朝日新聞]은, 이것(임시외교조사위원회)을 '정부 당국자가 반대당을 회유하려고 하는 일종의 구실에 다름 아니다"라고 하는 한편, 연일 사설에서, 국정을 가지고 놀며, 헌정의 상도를 짓밟는 이중기관의 폐해를 강조하고, 더불어 이누카이의 변절, 하라의 공과 이익에 전락한 태도를 끈질기게 추궁했다.
─ 朝日新聞百年史編修委員會 編, 『朝日新聞社史 大正·昭和戰前編』, 朝日新聞社, 1991, p.71.
어쨌든 데라우치 내각은 이로써 원하던 '거국일치'의 체제를 성립시킬 수 있었고, 이를 기반으로 하여 의도한 바대로 외교 문제 대응과 각종 정책의 시행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내각과 의회의 체제를 무시한 예외적이고 기형적인 기관의 설립은 소통의 부족을 낳았고, 데라우치 내각은 정책 시행의 효율성을 우선하여 독단적이고 은밀한 행동을 자주 행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일이 터지기 시작한다.
다음 편에 계속
耿君 編
# by | 2009/07/21 22:42 | 아시아에서 길을 잃다 | 트랙백 | 핑백(2)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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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으로부터 상세하게 훈시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黑田甲子郞, 『元帥寺內伯爵傳』, 元帥寺內伯爵傳記編纂所, 1920, pp.860-861.그리고 4월 20일. 총선거 날이 다가왔다.다음 편에 계속耿君 編== 편역자 주석 ==1) 대의사는 국회의원을 가리킨다.2) 가토 다카아키[加藤高明].3) 모토노 이치로[本野一郞]. 4) 하라 다카시[原敬].5) 봉천성 정가둔에 ...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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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세력의 비판] pp.250, 우자키 쿠마키치, 1914
.......어떤 사람들은 (문제는 있었지만!) 그럼 그렇지! 라고 했다가....다가올 반전을 기다렸을지도 모르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