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07월 20일
흰 무지개, 해를 뚫다 06 - 내각 불신임안 제출과 의회 해산
지난 편에 이어서
데라우치 내각이 성립된 후 제38회 제국의회가 1916년 12월 25일에 소집되었다. 이때 등원한 중의원 의원은 347명인데 이 중에서 헌정회 소속 의원만 해도 200명에 가까웠기 때문에 데라우치 내각으로서는 상당히 불리했다. 하지만 귀족원에서는 데라우치 내각에 호의적인 의원들이 많았기 때문에 상황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그리고 1917년이 밝아오면서 정당들은 본격적인 입장 표명을 하기 시작한다.
흰 무지개, 해를 뚫다 06
- 내각 불신임안 제출과 의회 해산
耿君이 삼가 엮음
하라 다카시가 이끌고 있던 정우회는 겉으로는 중립이라고 하였으나, 이는 사실상 내각에 대한 암묵적 지지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반면 이누카이 쓰요시가 이끄는 국민당과 가토 다카아키의 헌정회는 내각에 대한 탄핵과 불신임을 거론하며 노골적인 반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한편 데라우치는 내각에 대한 정당 및 의회의 반감을 누그러뜨리고자, 정우회, 국민당, 헌정회 세 당의 총재들을 저택으로 불러서 회견하였다. 그가 정당 지도자들에게 당부한 것은 바로 '거국일치'. 안팎으로 혼란스러우니까 거국적으로 뭉치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귀족원의 의원들과 조야에 영향력을 가진 귀족들을 만나 의견을 전달하고 협조를 부탁하였다.
휴회 기간이 지난 뒤 1월 23일부터 다시 국회가 열렸다. 데라우치와 모토노 외상은 이날 오전에 귀족원에서 앞으로의 정책 방침을 연설하였고, 오후에는 쇼다 대장대신도 참여하여 중의원에서 마찬가지로 정책 연설을 했다. 그 주된 내용은 바로 '국방의 충실, 외교의 쇄신'이었고, 당연히 전 내각, 나아가 당시 여당이던 헌정회에 대한 정책 비판이 가해졌다. 『원수 데라우치 백작전』에서는 궁지에 몰린 헌정회가 결국 막무가내로 데라우치 내각을 탄핵하는 길을 택했다는 식으로 당시 상황을 서술하고 있다.
갑작스런 의회 해산으로 인해, 결국 4월 20일 총선거가 다시 치러지게 되었고, 데라우치 총리는 이에 앞서 2월 10일, 각 부, 현의 지사들을 도쿄로 소집하여 정부의 시정 방침을 말하는데, 이때 총선거에 대한 공평한 조치를 훈시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렇다. 갑작스런 의회 해산 명령은 바로 데라우치가 사태의 악화를 예상하고 미리 손을 써놓은 것이었다. 내각을 전복하려는 의회 및 정당의 다수 세력을 숙청하기 위해, 데라우치는 일단 의회를 해산시키고, 선거를 통해 자기 내각을 반대하는 현 여당인 헌정회와 국민당을 절대 다수의 지위에서 몰아내려고 한 것이다.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데라우치는 '엄정한 감독'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4월 20일. 총선거 날이 다가왔다.
다음 편에 계속
== 편역자 주석 ==
1) 대의사는 국회의원을 가리킨다.
2) 가토 다카아키[加藤高明].
3) 모토노 이치로[本野一郞].
4) 하라 다카시[原敬].
5) 봉천성 정가둔에서 1916년 8월에 일어난 중국-일본 양 군대의 충돌 사건. 일본인 상인과 중국인의 다툼이 발단이 되어 양측 부대가 출동하였고, 그 과정에서 일본인 7명, 중국인 4명이 사망하였다. 이를 빌미로 일본군은 중국측 봉천군 제28사단을 내쫓고 정가둔을 점령하였으며, 오쿠마 내각은 이에 중국군과 사관학교의 일본인 고문 초빙, 일본 경관 배치 등 여러 권익을 요구하였다.
데라우치 내각이 성립된 후 제38회 제국의회가 1916년 12월 25일에 소집되었다. 이때 등원한 중의원 의원은 347명인데 이 중에서 헌정회 소속 의원만 해도 200명에 가까웠기 때문에 데라우치 내각으로서는 상당히 불리했다. 하지만 귀족원에서는 데라우치 내각에 호의적인 의원들이 많았기 때문에 상황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그리고 1917년이 밝아오면서 정당들은 본격적인 입장 표명을 하기 시작한다.
흰 무지개, 해를 뚫다 06
- 내각 불신임안 제출과 의회 해산
耿君이 삼가 엮음
해는 지나가고 다이쇼[大正] 6년(1917)의 신춘(新春)을 맞아 각 정당 정파는 점차 데라우치 내각에 대한 태도를 결정할 필요를 느꼈다. 정우회는 당초부터 엄정 중립의 태도를 견지하였다. 헌정회는 과거의 관계 상 데라우치 내각에 반대할 것임은 자연스러운 정세였다. 다만 국민당이 어떠한 태도로 나올 것인가는 세상 사람들이 아직 확실히 알지 못하는 것이었는데, 1월 8일에 이르러 국민당 총리 이누카이 쓰요시[犬養毅] 씨는 돌연 이즈[伊豆] 나가오카[長岡]에서 돌아왔다. 같은 달 10일, 급히 재경 대의사회(在京代議士會)1)를 개최하여 내각 탄핵안 제출의 당의(黨議)를 결정하였다. 즉각 이를 정우회에 교섭하였으나 정우회는 보기좋게 이를 거절하였다. 국민당은 또한 방향을 돌려 이를 헌정회에 교섭하니 가토[加藤] 자작2)은 환호하며 이에 찬동하였다. 아마도 헌정회, 국민당이 서로 제휴하여 내각을 탄핵한다면 데라우치 내각은 그 형세에 눌려 반드시 자멸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타협의 길을 열어야 할 것이라고 자신하였다. 1월 21일의 대회에서 정식으로 당의를 발표하고 바로 불신임안 제출의 수속을 밟았다.
─ 黑田甲子郞, 『元帥寺內伯爵傳』, 元帥寺內伯爵傳記編纂所, 1920, pp.827-828.
하라 다카시가 이끌고 있던 정우회는 겉으로는 중립이라고 하였으나, 이는 사실상 내각에 대한 암묵적 지지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반면 이누카이 쓰요시가 이끄는 국민당과 가토 다카아키의 헌정회는 내각에 대한 탄핵과 불신임을 거론하며 노골적인 반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데라우치) 백작은 이상의 교섭 여하에 관계 없이 1월 15일 오전 중 모토노[本野] 외상3)과 함께 가토 자작과 수상 저택에서 회견하여 내외의 추세에 비추어 거국일치의 필요성을 간담하였다. 오후에는 하라[原] 정우회 총재4), 이누카이 국민당 총리와 회견하고 마찬가지 이야기를 하였다. 이튿날인 16일에는 귀족원 각파의 대표자인 미시마 야타로[三島彌太郞], 아리치 시나노조[有地品之允], 아사다 도쿠노리[淺田德則], 구보타 유즈루[久保田讓] 네 사람과 회견하였다. 18일에는 또 도쿠가와 요리미치[德川賴倫], 오쿠다이라 마사유키[奧平昌恭], 야나기사와 야스토시[柳澤保惠], 가와무라 조자부로[河村讓三郞] 네 사람과 회견하여 의사 소통을 꾀하였다.
─ 黑田甲子郞, 『元帥寺內伯爵傳』, 元帥寺內伯爵傳記編纂所, 1920, p.828.
한편 데라우치는 내각에 대한 정당 및 의회의 반감을 누그러뜨리고자, 정우회, 국민당, 헌정회 세 당의 총재들을 저택으로 불러서 회견하였다. 그가 정당 지도자들에게 당부한 것은 바로 '거국일치'. 안팎으로 혼란스러우니까 거국적으로 뭉치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귀족원의 의원들과 조야에 영향력을 가진 귀족들을 만나 의견을 전달하고 협조를 부탁하였다.
휴회 기간이 지난 뒤 1월 23일부터 다시 국회가 열렸다. 데라우치와 모토노 외상은 이날 오전에 귀족원에서 앞으로의 정책 방침을 연설하였고, 오후에는 쇼다 대장대신도 참여하여 중의원에서 마찬가지로 정책 연설을 했다. 그 주된 내용은 바로 '국방의 충실, 외교의 쇄신'이었고, 당연히 전 내각, 나아가 당시 여당이던 헌정회에 대한 정책 비판이 가해졌다. 『원수 데라우치 백작전』에서는 궁지에 몰린 헌정회가 결국 막무가내로 데라우치 내각을 탄핵하는 길을 택했다는 식으로 당시 상황을 서술하고 있다.
백작 및 모토노 외상의 시정 연설은 외교상 비밀에 속하지 않는 한, 하등 숨기는 바 없이 매우 대담하고 솔직하게 대외정책을 말했다. 기왕에 있어서의 잘못된 외교를 적나라하게 보고하였다. 이 잘못이 있었기 때문에 데라우치 백작을 후계 내각으로 정하는 데에 주저한 헌정회는 당장 궁지에 빠졌다. 절대 다수에 의존하여 사자가 재빨리 달리는 형세로써 맹렬한 질문을 연발하였다. 데라우치 내각으로 하여금 한 마디 답도 못하게 하려고 한 것이다. 그런데 모토노 외상은 이에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강직한 답변을 하였다. 이에 더하여, 헌정회의 요구에 응하여 비밀 회의를 열어 유감없이 전 내각 외교의 실태를 폭로하여 헌정회로 하여금 그 면목을 잃게 만들었다.
이튿날인 24일, 예산위원총회가 열리자, 정우회 측에서는 왕성히 적본주의(敵本主義)의 질문을 연발하여 선거 간섭, 상(賞) 수여 남발, 대 지나(支那) 문제, 그 중에서도 정가둔(鄭家屯) 사건5), 채목 공사 사건 등의 진상을 비난하여 빈정거림의 극치에 달했다. 일이 이에 이르러서는 오직 절대 다수를 믿고 무리하게 데라우치 내각을 탄핵하는 활로만이 있을 뿐이었다.
25일, 중의원 본회의는 과연 긴급 동의로 예정 일정을 변경하고 내각 불신임안을 제출하였다. 그 이유서에 이르기를, "현 내각은 국민 여론의 기관인 제국의회에 기초를 두지 않는다. 거국일치를 표방하면서 조금도 그 실질이 없다. 입헌의 정도를 칭하면서 스스로 그 상궤(常軌)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오늘날 세계의 변화하는 국면에 대처하여 대정(大政)을 보익할 경륜을 갖고 있지 않다. 이것이 본안을 제출하여 처결을 촉구하는 이유이다"라고 했다. 이 이유서는 제출자 중 한 사람인 국민당 총리 이누카이 쓰요시가 기안한 것으로 헌정회는 그 교섭에 응하여 어떠한 심려도 없이 무의식적으로 이에 뇌동(雷同)하여 뜻밖에도 그 함정에 빠졌다. 이렇게 내각 불신임안은 국민당 28명, 헌정회 198명, 공정회 15명, 총 수 241명의 절대 다수에 의해 제출되었고, 이누카이 씨는 이를 부연하기 위해 등단하여 다음과 같이 연설하였다.
(연설 내용 생략)
이어서 토론에 들어가 정우회 측으로부터 모토다 하지메[元田肇] 씨가 등단하여 반대 의견을 진술했다. 이에 이어서 데라우치 수상은 다음의 의견을 서술하고 정부의 소신을 알려, 중의원의 맹렬한 반성을 촉구하였다.
(연설 내용 생략)
이어서 오자키 유키오[尾崎行雄] 씨가 등단하여 마침 발언하려고 하는데 해산의 조서가 돌연 전달되었다.
이렇게 해서 제38회 제국의회는 개회 3일 째에 이르러 해산되었다.
─ 黑田甲子郞, 『元帥寺內伯爵傳』, 元帥寺內伯爵傳記編纂所, 1920, pp.843-854.
갑작스런 의회 해산으로 인해, 결국 4월 20일 총선거가 다시 치러지게 되었고, 데라우치 총리는 이에 앞서 2월 10일, 각 부, 현의 지사들을 도쿄로 소집하여 정부의 시정 방침을 말하는데, 이때 총선거에 대한 공평한 조치를 훈시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제군! 지난 가을 본 대신이 중임을 맡은 초기에 먼저 각위(各位)에 대하여 소견을 열어보임으로써 현 내각의 내외에 대한 시정 방침을 천명하였다. 이후 현 내각은 다수 정당의 행동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어 중의원을 해산하고 이제 곧 다가올 4월 20일을 기하여 임시 총선거를 행하려고 함에 이르러 다시 각위들과 만나 정국 전후의 전말을 이야기하고 더불어 본 대신의 소회를 피력하는 것은 실로 시급한 일로 치워둘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제38회 제국의회의 해산은 실로 현 내각 불신임안의 제의에 말미암을 따름이다. 그리고 그 불신임안의 내용은 주로 현 내각이 국민여론의 기관인 제국의회에 기초를 두지 않은 것을 이유로 삼았고 게다가 대정 보익의 경륜을 갖지 못한 것이라 억지로 판단하여 그것을 핑계로 삼았던 것에 있다. 지금 제안의 이유에 대해 중의원에 있어서 각 정당의 주장을 골라보면 혹은 현 내각의 주의 정책이 어떤가를 묻지 않고서 적어도 의원에 기초를 두고 있지 않은 내각은 헌정의 본의에 있어서 그 존립을 용인할 수 없다고 주창하는 자가 있고, 혹은 지금에 있어서 내각제를 논쟁할 때가 아니고, 대신의 임명은 오로지 대권의 발동에 의하며 그 정당이냐 아니냐는 본디 논의할 것이 아니다, 다만 정당을 근저로 하지 않은 내각은 도저히 원만하게 정책을 수행할 수 없으므로 그 존립을 용인해선 안된다고 말하는 자가 있다. 그 논지라고 하는 것이 피차 상반되는 것이 이와 같다. 기타 의회의 정당에 기초 교섭을 하지 않은 내각은 이상으로서 바람직하지 않은 바라 하더라도 지금의 국정에 비추어보아 단순히 내각 조직의 형식이 그 이상에 합치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정쟁을 일삼는 것은 국가에 충실한 소이(所以)이 아니다.
(중략)
원래 제국의회는 귀족원, 중의원 두 원으로써 성립되며, 오직 한 원만을 인정하여 바로 국민여론의 기관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제국의회에 기초를 두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도 중의원의 결의는 그 한 원의 의사를 표시한 것에 그쳐, 귀족원을 포괄할 이치가 없음은 당연한 일이다. 하물며 다수당에 근거를 두지 않았다는 이유로 바로 제국의회에 기초를 두지 않았다고 말하는 데에 이르러서는 참망된 말이라고 할 것이다.
(중략)
이 광고(曠古) 미증유의 일대 변국에 즈음하여 내각은 신중한 조사를 다하여 내외의 계획을 운용하고 착착 그것의 실행에 힘써야 할 긴급한 시기를 맞아, 중의원에서 가장 세력을 갖고 있는 정당이 헌법상 자신들에게 주어진 협찬권(協贊權)을 멸시하며 긴급 중요한 의사를 던져놓고 갑자기 현 내각 불신임의 결의안을 제기하여 국무의 정체[澁滯]를 가져온 것은 그 책임이 다수를 믿고 비리를 저지르려고 하는 당여(黨與)에 돌아가야 함은 논할 것이 없다. 이때에 이르러 본 대신은 일단 소견을 피력하면서도 대세가 이미 정해져서 다시 움직일 수 없었다. 마침내 국사를 원만히 시행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여겨 엉켜 있는 일체의 실상을 배척하고 의원의 숙청을 기도하여 이에 그 의회가 끝나기를 기다리지 않고 해산의 대명을 내려주실 것을 주청하였다. 일이 이에 이른 것은 본 대신이 특히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바이나 실로 국가의 중책에 임함에 있어서 부득이한 일이었다. 중의원 해산의 전말 이유는 대략 이와 같다.
─ 黑田甲子郞, 『元帥寺內伯爵傳』, 元帥寺內伯爵傳記編纂所, 1920, pp.854-860.
그렇다. 갑작스런 의회 해산 명령은 바로 데라우치가 사태의 악화를 예상하고 미리 손을 써놓은 것이었다. 내각을 전복하려는 의회 및 정당의 다수 세력을 숙청하기 위해, 데라우치는 일단 의회를 해산시키고, 선거를 통해 자기 내각을 반대하는 현 여당인 헌정회와 국민당을 절대 다수의 지위에서 몰아내려고 한 것이다.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데라우치는 '엄정한 감독'을 결의하였다.
정부는 곧 행해질 총선거에 즈음하여 그 감독을 엄정히 하고 법규를 엄격히 시행하여 국민의 자유의사를 존중하고 좋은 것을 뽑는다는 목적을 관철시킬 것을 기약한다. 그런데 이를 기왕에 비추어보면 의원 후보자 및 그 응원자들이 선거장 안에서 유세함에 있어서 왕왕 법을 어기고 규율을 벗어나 망언과 욕설을 하는 자가 있다. 원래 언론의 자유는 헌법상 보장하는 바로 관민이 모두 그것을 존중해야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하나 언론은 결코 절대 무한으로 자유로운 것이 아니다. 요컨대 법률의 범위 내에 있어서 그러해야 하고, 원래 방자하고 망령되게 멋대로 행동하는 것을 허락하는 것이 아니다. 실로 언의(言議)로써 허구와 참소, 무고에 이르고 혹은 경박함과 과격함으로 흘러서, 위로는 황실의 존엄을 모독하고 아래로는 개인의 영예와 권리를 손상시켜 혹은 안녕함과 질서를 문란하게 하고 치안 공익을 방해하는 것과 같음에 있어서는 추호도 가차없이 엄히 임기방범(臨機防範)의 길을 강구할 것이다. 기타 선거 단속의 건에 대해서는 내무대신 및 사법대신으로부터 상세하게 훈시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 黑田甲子郞, 『元帥寺內伯爵傳』, 元帥寺內伯爵傳記編纂所, 1920, pp.860-861.
그리고 4월 20일. 총선거 날이 다가왔다.
다음 편에 계속
耿君 編
== 편역자 주석 ==
1) 대의사는 국회의원을 가리킨다.
2) 가토 다카아키[加藤高明].
3) 모토노 이치로[本野一郞].
4) 하라 다카시[原敬].
5) 봉천성 정가둔에서 1916년 8월에 일어난 중국-일본 양 군대의 충돌 사건. 일본인 상인과 중국인의 다툼이 발단이 되어 양측 부대가 출동하였고, 그 과정에서 일본인 7명, 중국인 4명이 사망하였다. 이를 빌미로 일본군은 중국측 봉천군 제28사단을 내쫓고 정가둔을 점령하였으며, 오쿠마 내각은 이에 중국군과 사관학교의 일본인 고문 초빙, 일본 경관 배치 등 여러 권익을 요구하였다.
# by | 2009/07/20 17:30 | 아시아에서 길을 잃다 | 트랙백 | 핑백(2)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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