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07월 17일
오다와라 평정 04 - 니노미야 신사
지난 편에 이어서
오다와라 성 천수각을 구경하고 나니, 이제 성 안의 주요 시설물들은 거의 다 본 셈이었다. 그럼 아까 천수각에 입장하면서 샀던 천수각-역사견문관 공통입장권을 활용하기 위해 니노마루의 역사견문관으로 가볼까 하는 순간, 내 눈을 사로잡는 표지판 하나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보덕 니노미야 신사'로 향하는 이정표였다. 호기심이 생긴 나는 이정표가 가리키는 대로 천수각 아래로 난 구불구불한 샛길을 따라갔다.
오다와라 평정 04
- 니노미야 신사
耿君이 삼가 지음
얼마 지나지 않아, '공원'이 된 오다와라 성의 현실을 극명히 드러내보이는 장소를 발견할 수 있었다.
천수각 밑에는 바로 조그만 놀이동산이 있었다! 드헛! 놀이동산을 빙 도는 미니 철도도 있고, 비록 아이들이 거의 없어 스산한 분위기가 풍겨서 그렇지, 완연한 유원지 놀이공원이 성 안에 자리잡고 있었다. 마음을 다잡고 다시 길을 걸어 내려갔다.
그러자 나타난 '보덕 니노미야 신사[報德二宮神社]'. 검은 글씨가 큼직큼직하니 적혀 있는 게 어쩐지 무섭기까지 했다. 안으로 들어가보자.
위 사진 속에 보이는 옛 해자 터를 가로질러 신사 경내로 들어갔다. 아마도 혼마루와 니노마루 사이를 나누는, 2편에서 도키와기 문 앞에 밭으로 채워져 있던 그 해자와 연결된 곳이리라.
신사 내부는 조용하고 차분한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 가끔 지나가는 사람이 한두 명 있을 뿐 인기척도 거의 없었다. 그래서 사람이 없는 줄 알았다가, 신사 본전 옆에 있는 부적 팔고 참배 접수 받는 곳에 신관 한 분이 계신 것을 보고 움찔 하고 놀랬다.
보덕 니노미야 신사(http://www.ninomiya.or.jp/)는 오다와라에서 태어난 위인 니노미야 손토쿠[二宮尊德]를 제신(祭神)으로 모시고 있는 신사이다. 니노미야 손토쿠는 1787년 오다와라 번 영지에 살던 부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손토쿠[尊德]는 휘(諱)인데, 원래는 '다카노리'라고 읽어야 한다고. 통칭은 긴지로[金次郞 또는 金治郞]였다.
긴지로는 부농의 자식인만큼 유복한 유년기를 보냈지만, 그가 다섯 살이 되던 해, 인근의 사카와 강[酒匂川]이 범람하여 가옥과 전답이 침수되면서 가세가 기울었고, 설상가상으로 14세에는 아버지가, 16세에는 어머니가 사망하면서 형제들이 흩어져 각기 다른 친척에게 맡겨지게 되었다. 긴지로는 큰아버지 집에서 기거하면서,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열심히 일하고, 틈틈이 시간을 아껴서 공부에 매진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긴지로는 농지 개간을 해서 곡물을 수확해 돈을 모으고, 집안이 몰락할 때 저당잡혔던 전답들을 조금씩 다시 사들여서, 마침내 24세가 되었을 때 일가를 다시 일으키게 되었다.
니노미야 손토쿠는 집안을 다시 일으키는 데에 성공하면서 지주 경영을 개시하였고, 오다와라 성으로 나아가 오다와라 번의 가로(家老)인 핫토리[服部] 가문에 봉공인(奉公人)으로 기용되었는데, 이때 핫토리 가의 재정 재건을 성공적으로 달성하면서 오다와라 번 안에서 유명해지게 되었다. 그 후 니노미야는 오다와라 번주 가문의 분가인 우쓰[宇津] 가문의 사쿠라마치[櫻町] 등지의 농촌 부흥과 경영을 담당하였고, 또 그 인근의 막부 직할령 경영도 맡게 되어 훌륭한 성과를 내었다. 니노미야가 이처럼 여러 차례의 성공을 거둔 재정 재건 방식을 '보덕사법(報德仕法)'이라고 하는데, 이는 니노미야의 보덕 사상에 기초한 것이다. 보덕 사상이란 니노미야가 주창한 경제사상으로, 인도(人道), 인심에 따라 사리사욕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천도(天道)를 따르며 사회에 공헌하는 일을 하게 되면 결국 자신들 각자에게 그것이 환원된다는 내용의 사상이다.
그래서 그러한 도심(道心)에 따르는 덕과 인에 해당하는 상태인 '지성(至誠)'의 단계에 이르러, 그 상태로 일상생활에서의 선택에 임하여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을 '근로(勤勞)'라고 한다. 이러한 지성과 근로가 소비생활에서는 '분도(分度)'로 나타나는데, 분도란 단순히 구두쇠같이 아껴쓰는 것이 아닌, 자연스럽게 써야 하는 것만을 쓰는 것이다. 이렇게 쓸 것만 쓰고 남은 것들을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는 것이 '추양(推讓)'이다. 이것도 단순히 퍼다주는 것이 아니라, 지성에 이르고 근로한 뒤 분도하고 나서 남은 것을 준다는 것이다. 이런 보덕 사상을 보급하기 위해, 니노미야의 제자인 오카다 사헤이지[岡田佐平治]가 도토미노쿠니[遠江國]에 보덕사(報德社)를 설립하는 등, 제자들에 의해 여러 구니[國]에 보덕사들이 세워졌다.
그리고 1894년 4월, 이세, 미카와, 도토미, 스루가, 가이, 사가미 6개 구니의 보덕사에서는 니노미야 손토쿠를 기리는 뜻을 모아, 니노미야를 신으로 모시고 그의 탄생지인 오다와라에 신사를 세웠다. 바로 오다와라 성 니노마루에 있는 이 '보덕 니노미야 신사'가 그것이다.
신사 안에는 사진에 보이는, 나뭇짐을 지고 책을 읽는 소년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이것이 바로 니노미야 긴지로 동상이다. 도쿄 맑음 06 - 저물어가는 이케부쿠로 포스팅에서도 니노미야 소년의 동상 이야기가 잠깐 나왔었다.
이 동상은 1920년대부터 면학을 권장할 의도로 일본 전국 각지의 소학교에 세워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과연 니노미야가 나뭇짐을 지고 책을 읽는 저런 모습을 하고 있었느냐면 그것은 사실이라고 할 수는 없다. 물론 니노미야는 소년 시절에, 열심히 일하는 와중에도 틈틈이 남는 시간에 공부를 하였다는 것은 기록에 보이나, 땔감을 등에 지고 책을 읽으며 걸어가는 모습을 직접 묘사한 것은 1881년에 발행된 『보덕기(報德記)』라는 책에서 처음으로 나오고, 고다 로한[幸田露伴]이 1891년에 펴낸 『니노미야 손토쿠 옹[二宮尊德翁]』에 그러한 모습을 그린 삽화가 등장한다. 후대에 만들어낸 이 이미지는 1904년에 수신(修身) 교과서에서 니노미야의 이야기가 등장함에 따라 서서히 굳어지기 시작했고, 1910년에 오카자키 셋세이[岡崎雪聲]가 지금과 같은 모습의 동상을 만들어 도쿄 조공회(彫工會)에 출품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1924년, 아이치 현의 한 소학교에 처음으로 니노미야 긴지로 소년의 나뭇짐 지고 책 읽는 동상이 세워지면서, 쇼와 시대에 지역민들과 졸업생들의 지원으로 각지의 학교 교정에 많은 수의 동상이 급격히 세워지게 되었다.
신사 안에 있는 니노미야 긴지로 동상은 좀더 각별한 의미를 가진다. 이 동상은 쇼와 3년(1928), 쇼와 천황의 즉위 대례 기념으로 고베에 사는 나카무라 나오키치[中村直吉]라는 사람이 기진하여 만든 것인데, 제작자는 3대 게이지 엔초[慶寺圓長]라고 한다.
태평양 전쟁을 겪으면서, 전국 각지에 있던 긴지로 동상은 공출의 운명에 처해졌다. 수많은 동상들이 공출되었지만, 그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남은 동상이 바로 이 신사 안에 있는 동상이라고 한다. 그리고 1920년대 당시, 미터법의 보급을 위하여 의도적으로 동상의 키를 1미터로 하여 제작하였고, 이를 통해 아이들에게 1미터가 이 정도 길이라는 것을 실감시켜주는 역할을 했다고.
신사를 나와서 다시 천수각 쪽으로 갔다. 그리고 아까 나왔던 니노마루 광장 쪽으로 가서 역사견문관으로 향했다. 이곳에는 고호조 가문의 성쇠를 다룬 역사 전시물들이 주로 전시되어 있었는데, 인형극이나 3D 영상 같은 것들이 다소 유치하기는 했지만 볼만 했다. 센고쿠 시대의 이야기 외에도 에도 시대 등의 풍속에 대해 알려주는 전시물도 있어서 유익했다.
이제 오다와라 성과 작별할 시간. 마나비바시 쪽으로 향하는데, 광장 한켠에 비석들이 세워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비석에는 '메이지 천황 행행소(行幸所)', '메이지 천황 주필지(駐蹕址)'라고 적혀 있어, 여기에 메이지 천황이 왔다갔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왼쪽 비석의 내용을 읽어보니 메이지 8년(1875) 쯤에 천황이 왔던 모양이다.
다음 편에 계속
오다와라 성 천수각을 구경하고 나니, 이제 성 안의 주요 시설물들은 거의 다 본 셈이었다. 그럼 아까 천수각에 입장하면서 샀던 천수각-역사견문관 공통입장권을 활용하기 위해 니노마루의 역사견문관으로 가볼까 하는 순간, 내 눈을 사로잡는 표지판 하나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보덕 니노미야 신사'로 향하는 이정표였다. 호기심이 생긴 나는 이정표가 가리키는 대로 천수각 아래로 난 구불구불한 샛길을 따라갔다.
오다와라 평정 04
- 니노미야 신사
耿君이 삼가 지음
얼마 지나지 않아, '공원'이 된 오다와라 성의 현실을 극명히 드러내보이는 장소를 발견할 수 있었다.




보덕 니노미야 신사(http://www.ninomiya.or.jp/)는 오다와라에서 태어난 위인 니노미야 손토쿠[二宮尊德]를 제신(祭神)으로 모시고 있는 신사이다. 니노미야 손토쿠는 1787년 오다와라 번 영지에 살던 부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손토쿠[尊德]는 휘(諱)인데, 원래는 '다카노리'라고 읽어야 한다고. 통칭은 긴지로[金次郞 또는 金治郞]였다.
긴지로는 부농의 자식인만큼 유복한 유년기를 보냈지만, 그가 다섯 살이 되던 해, 인근의 사카와 강[酒匂川]이 범람하여 가옥과 전답이 침수되면서 가세가 기울었고, 설상가상으로 14세에는 아버지가, 16세에는 어머니가 사망하면서 형제들이 흩어져 각기 다른 친척에게 맡겨지게 되었다. 긴지로는 큰아버지 집에서 기거하면서,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열심히 일하고, 틈틈이 시간을 아껴서 공부에 매진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긴지로는 농지 개간을 해서 곡물을 수확해 돈을 모으고, 집안이 몰락할 때 저당잡혔던 전답들을 조금씩 다시 사들여서, 마침내 24세가 되었을 때 일가를 다시 일으키게 되었다.
니노미야 손토쿠는 집안을 다시 일으키는 데에 성공하면서 지주 경영을 개시하였고, 오다와라 성으로 나아가 오다와라 번의 가로(家老)인 핫토리[服部] 가문에 봉공인(奉公人)으로 기용되었는데, 이때 핫토리 가의 재정 재건을 성공적으로 달성하면서 오다와라 번 안에서 유명해지게 되었다. 그 후 니노미야는 오다와라 번주 가문의 분가인 우쓰[宇津] 가문의 사쿠라마치[櫻町] 등지의 농촌 부흥과 경영을 담당하였고, 또 그 인근의 막부 직할령 경영도 맡게 되어 훌륭한 성과를 내었다. 니노미야가 이처럼 여러 차례의 성공을 거둔 재정 재건 방식을 '보덕사법(報德仕法)'이라고 하는데, 이는 니노미야의 보덕 사상에 기초한 것이다. 보덕 사상이란 니노미야가 주창한 경제사상으로, 인도(人道), 인심에 따라 사리사욕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천도(天道)를 따르며 사회에 공헌하는 일을 하게 되면 결국 자신들 각자에게 그것이 환원된다는 내용의 사상이다.
그래서 그러한 도심(道心)에 따르는 덕과 인에 해당하는 상태인 '지성(至誠)'의 단계에 이르러, 그 상태로 일상생활에서의 선택에 임하여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을 '근로(勤勞)'라고 한다. 이러한 지성과 근로가 소비생활에서는 '분도(分度)'로 나타나는데, 분도란 단순히 구두쇠같이 아껴쓰는 것이 아닌, 자연스럽게 써야 하는 것만을 쓰는 것이다. 이렇게 쓸 것만 쓰고 남은 것들을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는 것이 '추양(推讓)'이다. 이것도 단순히 퍼다주는 것이 아니라, 지성에 이르고 근로한 뒤 분도하고 나서 남은 것을 준다는 것이다. 이런 보덕 사상을 보급하기 위해, 니노미야의 제자인 오카다 사헤이지[岡田佐平治]가 도토미노쿠니[遠江國]에 보덕사(報德社)를 설립하는 등, 제자들에 의해 여러 구니[國]에 보덕사들이 세워졌다.
그리고 1894년 4월, 이세, 미카와, 도토미, 스루가, 가이, 사가미 6개 구니의 보덕사에서는 니노미야 손토쿠를 기리는 뜻을 모아, 니노미야를 신으로 모시고 그의 탄생지인 오다와라에 신사를 세웠다. 바로 오다와라 성 니노마루에 있는 이 '보덕 니노미야 신사'가 그것이다.

이 동상은 1920년대부터 면학을 권장할 의도로 일본 전국 각지의 소학교에 세워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과연 니노미야가 나뭇짐을 지고 책을 읽는 저런 모습을 하고 있었느냐면 그것은 사실이라고 할 수는 없다. 물론 니노미야는 소년 시절에, 열심히 일하는 와중에도 틈틈이 남는 시간에 공부를 하였다는 것은 기록에 보이나, 땔감을 등에 지고 책을 읽으며 걸어가는 모습을 직접 묘사한 것은 1881년에 발행된 『보덕기(報德記)』라는 책에서 처음으로 나오고, 고다 로한[幸田露伴]이 1891년에 펴낸 『니노미야 손토쿠 옹[二宮尊德翁]』에 그러한 모습을 그린 삽화가 등장한다. 후대에 만들어낸 이 이미지는 1904년에 수신(修身) 교과서에서 니노미야의 이야기가 등장함에 따라 서서히 굳어지기 시작했고, 1910년에 오카자키 셋세이[岡崎雪聲]가 지금과 같은 모습의 동상을 만들어 도쿄 조공회(彫工會)에 출품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1924년, 아이치 현의 한 소학교에 처음으로 니노미야 긴지로 소년의 나뭇짐 지고 책 읽는 동상이 세워지면서, 쇼와 시대에 지역민들과 졸업생들의 지원으로 각지의 학교 교정에 많은 수의 동상이 급격히 세워지게 되었다.

태평양 전쟁을 겪으면서, 전국 각지에 있던 긴지로 동상은 공출의 운명에 처해졌다. 수많은 동상들이 공출되었지만, 그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남은 동상이 바로 이 신사 안에 있는 동상이라고 한다. 그리고 1920년대 당시, 미터법의 보급을 위하여 의도적으로 동상의 키를 1미터로 하여 제작하였고, 이를 통해 아이들에게 1미터가 이 정도 길이라는 것을 실감시켜주는 역할을 했다고.


다음 편에 계속
耿君 識
# by | 2009/07/17 19:48 | 일본에 가다 | 트랙백 | 핑백(2) | 덧글(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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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1920년대 당시, 미터법의 보급을 위하여 의도적으로 동상의 키를 1미터로 하여 제작하였고, 이를 통해 아이들에게 1미터가 이 정도 길이라는 것을 실감시켜주는 역할을 했다고."
라고 본문에서 하셨습니다만, 제시된 사진에서는 <동상을 통해 아이들에게 1M를 각인시켜주었다>는 말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무슨 연유인지요?
그런데 '1m를 각인시켜주었다'는 표현은 좀 그렇지 않나요 ㅎ '아 1미터가 저정도구나' 하고 실감하게 해주는 정도지요.
각인이든 실감이든 간에, 상단에 사진을 제시하고 그 아래에 해당 사항을 설명하는 상황에서 사진에 나와있지 않은 문구를 다른 인용구나 설명없이 서술하면, 의도치 않은 오해가 생기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