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라우치 마사타케의 일화 '백작과 고적', '조선인 본위'

『원수 데라우치 백작전』의 뒷부분에는 '일화영문(逸話零聞)'이라는 권말부록이 있습니다. 이는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일화들을 모아놓은 것인데요, 그 중에는 한국통감, 조선총독으로 근무할 당시의 일화나 조선인에 대한 이야기도 들어 있습니다. 그 중에서 꽤나 인상적인 두 글이 있어서 여기에 옮겨봅니다. 글 속에 보이는 데라우치 총독의 모습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것과는 많이 달라 보이는데, 이것이 위선이었는지 진심에서 나온 행동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본 포스팅은 黑田甲子郞, 『元帥寺內伯爵傳』(元帥寺內伯爵傳記編纂所, 1920)의 '逸話零聞'에서 148-149쪽에 나오는 '伯と古蹟'과 159쪽에 나오는 '鮮人本位'를 번역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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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작과 고적

耿君이 삼가 옮김


조선의 고적, 옛 물건의 보존에 대해 백작이 배려하신 일은 예삿수준의 것이 아니었다. 석탑, 불상 등이 반도 바깥으로 유실되는 일을 근심하셔서 조사 후 세관에서 차압하는 길을 강구하시고, 또 박물관을 건설하여 그 보존을 계획하시는 등 그 예는 나를 바꿔도1) 다 들 수 없을 정도이다. 각지의 성벽, 누문 등은 일에 방해되지 않는 한은 철폐하는 것을 허락치 않고, 그 총독박물관에 진열된 우량한 물건들은, 대부분 백작이 직접 구하셔서 기증하신 것들이라 해도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또 해인사의 대장경에 2만여 원을 들여 인쇄하신 일은 조선인이 주지하는 바인데, 이러한 일들은 도저히 보통 사람으로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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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본위

耿君이 삼가 옮김


백작이 평소 사용하시는 술과 담배는 특히 우량한 것을 고르셨다. 그러나 만약 조선에서 산출된 것이라면, 어떠한 조악한 물품이라도 흔쾌히 그것을 즐겨쓰셨다. 예를 들어 한 병에 수십 금 하는 브랜디와 중앙시험소2)의 미제품(未製品)인 포도주가 식탁 위에 나란히 올라오는 것은 일종의 기이한 광경을 연출하였다.
즉 백작이 조선인의 손으로 만들어진 물건은 한층 더 애용하고 완상하셨던 것을 생각해도, 얼마나 조선통치가 조선인을 본위로 하여 수립되었고, 그들을 자애(慈愛)하셨는지를 미루어 알 수 있으리라.
일찍이 백작이 사직단으로 산책을 하실 때, 조선의 한 노인이 그 손자 두세 명과 뭔가에 힘쓰고 있는 것을, 발길을 멈추고 잠시 지켜보고 계셨는데, 이윽고 손자되는 남자아이를 통해 계속 대화하셨다. 이러한 예는 백작으로서 그다지 신기하지 않은 일이었다.

耿君 譯


== 역자 주석 ==
1) 원문에는 '僕を換ふるも'라고 되어 있어 그대로 번역하였으나 확실하지는 않음. 여기서 나라고 하는 것은 명시되어 있지 않으나, 혹 '백작과 고적'의 앞에 나오는 일화와 그 다음 일화를 소개한 사람인 구도 쇼헤이[工藤壯平]인가.
2)
1912년에 설립된 조선총독부 소속 기관으로, 공업 조사 및 실험을 행하던 곳.

by 耿君 | 2009/07/16 10:15 | 반추, 번역의 미 | 트랙백 | 덧글(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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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Allenait at 2009/07/16 10:27
좀 뭔가 미화한 감이 있는 것 같군요
Commented by 耿君 at 2009/07/16 13:00
그렇죠 아무래도 전기니까 ㅋ
Commented by rumic71 at 2009/07/16 11:24
조선 덕후의 탄생
Commented by 耿君 at 2009/07/16 13:00
ㅋㅋ
Commented by 슈타인호프 at 2009/07/16 11:47
이미지메이킹의 일환이었겠지만, 나름 "통치자"의 입장에서 조선 땅에 대한 배려라든가가 전혀 없었다고도 말 못하겠지요.

데라우치 시절 처음 열린 물산공진회(산업박람회)도 나름 자기 "치적"을 자랑하고픈 결과 아니었겠습니까.
Commented by 耿君 at 2009/07/16 13:00
예 백작전에 보면 물산공진회 이야기가 한 장(章)을 차지합니다.
Commented by TSUNAMI at 2009/07/16 12:36
아무튼 이런 모습으로도 실제에서 나타난 철권적인 헌병경찰통치에 대한 반발(원래는 일본에 대한 역사적 적대의식이 누적되어 온 결과이지만)이 기미년의 만세 시위를 불러왔다는 것도 누가 봐도 부인하기 어려울 듯 합니다. (경찰통치에 대한 불만을 누적시키기 위한 전략이든, 개인적은 문화적 호사취미의 발현이든)
Commented by 耿君 at 2009/07/16 13:01
저도 뭐 이런 사실을 제기해서 조선총독부의 초기 통치를 미화하려는 건 아닙니다 ㅋ
Commented by 카구츠치 at 2009/07/16 12:46
뭔가 요즘의 친서민정책 하고 비슷하다는 느낌... (주어는 없습니다)
Commented by 耿君 at 2009/07/16 13:01
서민들과 대화를 나눈다거나...;;
Commented by 슈타인호프 at 2009/07/16 13:02
그런 면에서는 우가키를 따라갈 총독이 없지 않을지~~
Commented by 무명 at 2009/09/14 23:11
당시 기록들을 보면 의외로 일본인들이 조선에 대한 일종의 '애정'을 갖고 있던 것 같습니다. 보통 당시 일본인들은 조선을 멸시하기만 했다고 알고 있는데 말이죠. 그런데 문제는 '열등한 조선을 우리가 이끌어서 개명해줘야 한다'는, 우월감이 깔린 애정이었다는 것이겠습니다만. 아마도 그런 쪽에서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Commented by 耿君 at 2009/09/15 01:37
아무래도 그렇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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