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07월 15일
흰 무지개, 해를 뚫다 04 - 요시노 사쿠조의 데라우치 내각 비판 (2)
지난 편에 이어서
요시노 사쿠조의 「데라우치 내각의 출현에 대한 엄정비판」 나머지 뒷부분이다. 앞서서는 일본 헌정의 대세가 정당주의이고, 초연내각 수립은 이에 대한 일시적인 반동이라는 것이 서술되었고, 초연내각이 등장하게 된 원인을 짚어보았다면, 이번에는 초연내각이 왜 헌정의 적이 되는지를 논하면서 국민들에게 정당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촉구하고 있다. 덧붙이자면 요시노 사쿠조는 글 속에서 줄곧 자신의 '역사가'로서의 입장을 강조하고 있어 흥미롭다.
흰 무지개, 해를 뚫다 04
- 요시노 사쿠조의 데라우치 내각 비판 (2)
耿君이 삼가 엮음
다음 편에 계속
요시노 사쿠조의 「데라우치 내각의 출현에 대한 엄정비판」 나머지 뒷부분이다. 앞서서는 일본 헌정의 대세가 정당주의이고, 초연내각 수립은 이에 대한 일시적인 반동이라는 것이 서술되었고, 초연내각이 등장하게 된 원인을 짚어보았다면, 이번에는 초연내각이 왜 헌정의 적이 되는지를 논하면서 국민들에게 정당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촉구하고 있다. 덧붙이자면 요시노 사쿠조는 글 속에서 줄곧 자신의 '역사가'로서의 입장을 강조하고 있어 흥미롭다.
흰 무지개, 해를 뚫다 04
- 요시노 사쿠조의 데라우치 내각 비판 (2)
耿君이 삼가 엮음
3
관료 일파의 옛 사상에는 오늘날 또한 그것에 찬성하는 자가 적지 않다. 그에 대해서는 내가 지금까지 누차 언설을 시도한 적이 있는데, 이번 정변에 즈음해서도, 정면에서 이를 논박하는 논의 정도에 그친 것 같으므로, 나는 중복을 돌아보지 않고 또한 간단히 몇 마디를 덧붙여 두고자 한다.
첫째로 정당내각주의가 헌법상 군주의 대권을 침범한다고 하는 설은, 그들의 잘못된 견해를 만들고 있는 근본적 사상이다. 헌법의 규정에 의하면, 내각대신의 임면은 온전히 군주의 대권에 속해 있다. 이는 당연히 말할 것도 없다. 그렇지만서도, 군주가 대신을 임면한다고 하는 법률상의 원칙은, 어떠한 내각에서도 적용이 되므로, 정당내각이기 때문에 이 법률상의 원칙을 배척하는 것은 아니다. 원래 세상의 헌정을 논하는 것은, 자칫하면 법률상의 원칙과 정치상의 원칙을 혼동하기 쉽지만, 대신 임면의 권한이 군주에게 있다는 것은, 국법 조직의 형식상의 원칙으로, 이 원칙의 실제 운용에 대해서는, 따로 스스로 정치상 각각의 원칙이 성립할 여지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군주는 사실상 완전한 독립적 판단으로써 대신의 선임 경질을 전행하시지 않는 것을 상례로 하기 때문이다. 다만 정계에 이상한 변고가 있는 경우에는, 예외로서 그 고유의 법률상 권력에 기반하여, 완전히 독립적인 선임을 할 수는 있으리라. 그렇지만 통상적인 경우에 있어서는, 정치상 스스로 정한 바의 특정 기관에 자문하여 대신의 선정에 관여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소위 법률상의 원칙이라는 것은, 말하자면 최종 해결방법에 속하는 것으로, 보통의 경우에는, 그 범위 내에서 따로 편의의 법칙이 성립하는 것을 막지 않고, 또 오히려 그것이 있음으로써 득책(得策)으로 삼아야 하는 것이다. 다른 예로써 이를 비유하자면, 우리나라 민법에서는, 자식에 대한 부양의 의무를 다하지 않은 부모가 있을 때, 그를 법정으로 출소하여 그 의무를 강제시키는 권리를 자식에게 인정하고 있다. 아마도 이렇게 하지 않으면 국가는 제2의 국민이라 할 자제의 교양을 충분히 철저하게 시행할 수 없기 때문에, 최후의 부득이한 해결방법으로서, 즉 자식에게 부모를 고소할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리라. 그렇지만, 자식으로서 부모를 법정에 고소하는 것은, 우리들의 도의심이 그것을 가볍게 하기를 허락하지 않는 바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도덕적 상식은, 부양의 의무를 게을리한 부모에 대해서 사실상 어떠한 수단을 취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각각 도덕상의 수단을 암시하고 있다. 민법이 정한 바의 법률상의 원칙은, 그것을 최종 해결방법으로서, 오히려 보통 때에는 그것을 사용하지 않는 것을 괜찮다고 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군주가 직접 대신을 임면하는 것과 같은 방법도, 또한 그것을 상용하지 않는 득책으로 하는 것으로, 결국 임명권은 늘 군주에게 유보되면서도, 사실상의 선임에 있어서는 편의상 자연히 정해진 바의 각반(各般) 방법에 맡기는 쪽이 좋은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실제상의 취급을 보더라도, 소위 법률적 원칙이 결코 반드시 늘 엄격히 시행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 법률적 원칙에 저촉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예전부터 각반의 정치적 원칙이 사실적으로 세워져 온 것이 아닌가. 예를 들면 퇴임 수상이 후임자를 추천하는 예와 같이, 또는 원로회의가 추천의 논의를 받드는 예와 같음이 이것이다. 그렇다면 또한 제3의 방법으로서, 의회가 그 다수당의 수령을 추천하는 정치적 원칙도 또한, 주장함에 어떤 부적합함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헌법상 대신 임면의 권한은 군주에 있다고 하는 것을 방패로 하여 정당내각주의를 배척하려고 하는 것은, 흡사 민법의 원칙을 방패삼아, 자식에게 강요하여 당장 어버이를 고소하는 조치를 취하게 하여, 그밖에 먼저 정해진 바의 도덕적 수단에 의하려고 하는 것을 민법 위반이라고 하는 부류이다. 하물며 군주 대권의 이름에 숨어서, 대신 추천의 권한을 오래도록 자기 가문의 손바닥 안에서 농단하려고 하는 것과 같음이라면, 그것은 너무도 방자하고 참월(僭越)하다. 그러므로 만약 원로 일파가 굳이 종래의 입장을 유지하기를 원한다면, 모름지기 대신 선정에 관한 정치적 원칙은 소수자의 추천을 정당한 것으로 하는지 다수자의 추천을 정당한 것으로 하는지의 이해득실의 논단(論斷)에 근거해야 할 것이다. 헌법 법리의 의논에서 고압적으로 반대 논설을 굴복시켜 없애려고 함은 이치에 전혀 맞지 않고 요컨대 너무 교활하다.
내가 믿는 바에 따르면, 대신의 선임, 서임에 관한 정치적 원칙으로서는, 정당내각주의가 이론상 정당하고 또 실제상 가장 자연적인 진행에 순응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일은 내가 종래 여러 기회에서 누차 말했던 바이기 때문에 여기에서 반복하지 않겠다. 다만 그에 대한 2, 3가지 비판에 대해서는, 이번 기회를 이용하여 다소의 변명을 할 필요가 있음을 인정한다. 첫째로 정당내각주의는 의회에서의 '다수'라고 하는 형식에 얽매여 있다고 비난하는 자가 있다. 과연 '다수'가 반드시 정의라고 할 수 없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렇지만 오늘날 '다수'를 제외하고 과연 정의의 소재를 확정할 어떤 객관적인 표준이 있는가. 소수의 의견이라도 정리(正理)에 부합하는 것이 극히 명백한 경우는, 결국 다수의 찬동을 얻을 것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그 자체가 일종의 권위를 가지게 됨은, 우리들이 일상에서 경험하는 바이다. 그렇지만, 무엇을 정리로 삼을 것인가 하는 의문이 있을 경우, 늘 어쩔 수 없이 결정을 '다수'로 취함은 사회에서 일반적인 일로 모두 그렇게 한다. '다수'는 늘 올바르지는 않더라도, 많은 경우를 평균하여 보면, 정의가 대개 늘 '다수'의 편이라는 것은, 또한 우리들의 경험이 의심할 수 없는 바이다. 또 다음으로 정당주의는 군주의 대권을 구속한다고 하는 비난도 있다. 그러나 의회에서의 다수당의 영수로써 정부를 조직할 수 있다고 하는 일이 군주 대권의 구속이 된다고 한다면, 어째서 원로회의의 추천이 대권의 구속이 되지 않는가. 게다가 의회에서의 '다수'라고 하는 것은, 그것을 크게 보면 형식적으로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정계의 변동에 동반하여 자유자재로 굽히고 펴는 것이다. 적어도 그 이상적인 형태에 있어서는, 국내에서의 가장 건전한 사상을 반영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다수'가 대표하는 의견이 소수 식자의 소위 '현명한 의견'과 상반되는 것이라 하면, 그것은 대개 소수자가 사회의 다수자를 지도하는 도덕적 임무를 게을리한 때에 보이는 현상이다. 그러므로 만약 정당의 건전한 발달에 의해 다음에 말하는 것 같은 상하상친(上下相親)의 사회적 이상을 실현하는 일이 가능하기에 이르면, '다수'의 의견은 즉 가장 현명하고 건전한 의견이며, 또한 국가의 요구와도 합치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당주의는, 적어도 그 이상적 형태에 있어서는, 사실상 대권의 구속이라 할 것이 아니다. 하물며 군주가 최후의 경우에 있어서의 결정권을 가지신다는 뜻은 어떠한 경우에도 바뀔 수 없음임에랴. 그러므로 국가의 이상사태에 대처하여, 예를 들면 정계가 분란하여 무엇으로써 다수를 삼을 것인가가 명확하지 않은 경우에는, 당분간 정당의 바깥에 초탈하여 순전한 대권 내각을 만드는 것 또한 막지 않는다. 이는 대권이 대권다운 이유이다. 다만 대권이 대권다운 이유를 정치상에 있어서 충분히 존중, 옹호한다고 하면, 무엇보다 먼저 그것을 남용함을 자제해야 한다. 대권을 구실로 삼아 정당주의의 억압, 배척을 일삼는 것은, 오히려 대권을 군의(群議)의 자리에 드러내는 위험을 것이 아니겠는가.
셋째로 정당주의는 다수의 우자(愚者)들로 하여금 중요한 국무에 관여하게 하는 것이라는 비난이 있다. 이 논거에서 성립하는 비난은 또한 둘로 나뉘어, 하나는 중우(衆愚)가 실제 정권 운용의 지도자가 되므로 나쁘다고 하고, 또 하나는 중우는 결국 소수의 영수에게 지배되어, 소위 다수주의와 맞지 않는 과두정치의 폐해에 빠지므로 안된다고 비난한다. 그렇지만, 이 두 가지의 비난이 가끔은 또한 정당정치의 묘용(妙用)을 말해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정당은 소수의 현자로 하여금 다수를 지도하게 하는 기회를 만들고, 또한 지도된 다수가 소수의 현자를 감독하면서, 그 정치적 활동을 후원하는 정치상 매우 중요한 기관이기 때문이다. 국가의 운명을 창출하는 정신적 기초가 늘 소수 현자의 활발한 두뇌의 움직임에 의하는 것은, 어느 시대에나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오늘날 시세로는, 다수자의 의지를 전혀 무시해서는, 아무리 탁월한 사상이라도 결코 실제 정치상에 중용될 수 없다. 왜냐하면 다수자는 오늘날 이미 정계에서의 유력한 요소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수의 세력이 오늘날 매우 중요해진만큼, 그만큼 또 그들이 소수 현자의 정신적 지도를 받는다고 하는 것은, 국가의 건전한 발달을 이룩하는 데에 있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러므로 현대의 정치는 형식상 반드시 다수정치여야 함과 동시에, 실질적으로 또한 반드시 소수자의 정신적 활동이 가장 중요해지는 정치여야 한다. 그리고 다수와 소수, 바꿔말하면 하층계급과 상류계급의 상호 교섭을 잘 만들어내는 것은, 즉 정당이다. 세상 사람들 다수는 정당정치의 중우 세력 아래 움직인다고 하는 외면적 형식만에 착안하여, 그것이 있음에 따라 소수 현자가 비로소 현실적으로 다수와 접촉하고, 그들을 지도하고 있다는 내면적 작용을 간과하는 것은, 심히 마땅치 않다고 생각한다. 요컨대 정당정치는, 한편으로는 분명히 중우정치이다. 그렇지만, 소수의 현자가 근세 정치의 무대에 올라 효과적으로 그 생각을 실행하는 길은, 또한 정당정치 외에는 결단코 없다. 그러므로 정당은 진정한 귀족정치의 이상을 오늘날에 실현시켜주는 유일한 근세적 설비라 말해도 좋다. 넷째로 정당의 현상에 불만이라 하여, 정당정치에 걱정하는 마음을 품는 자가 있다. 그렇지만, 불만족은 어느 것에나 있다. 정당의 현상에 만족하기 어려운 자가 있다고 해서, 그것이 바로 초연주의를 시인하는 이유는 되지 않는다. 좋은 초연내각은 결코 나쁜 정당내각보다도 크게 우월한 것이 아님은 뒤에서 서술하겠다. 그리고 요즘 세상이 되어서는, 이제 정당정치가라고 해서, 관료정치가와 비교하여 늘 반드시 몇 등급 떨어진다고만은 할 수 없게 되었다. 만약 실제 정치의 당국자로서, 정당정치가 쪽이 어느 정도 뒤떨어져 있는 듯이 보인다고 한다면, 그것은 정권을 장악한 경험이 짧기 때문이다. 무릇 정당은 정권을 쥐는 경험을 쌓아감에 따라 진보하고 또 그 면모를 바꾸게 되는 것임은, 여러 외국의 실례를 보더라도 명백하다. 또한 정당은 그 자체가 늘 진화하는 것이다. 우리들은 정당의 현상을 보고 그것을 매도하기보다도, 오히려 그 진보, 개선을 응원하는 것이 크게 국가를 위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세상 사람들은 툭하면 정당정치의 폐해를 들어 빈번히 그것을 매도한다. 그렇지만 그밖에 비교해보면 정당정치보다 나은 어떤 정치주의가 존재하는가. 소수 현자에게 정권을 위탁해야 한다는 말 같은 경우는, 그 말이 괜히 아름다워 보이나 그 실제 폐해가 큰 것을, 여러 외국의 역사는 구체적으로 경험해 왔다. 또 소수 현자의 입장에서 말해도, 그들로 하여금 만약 정계에서 활약하여 크게 국가를 위해 일하도록 하려는 생각이 있다면, 민간 세력에 초월하여 독립적으로 초연내각을 만들려는 등의 태도로 나오지 말고, 마땅히 몸을 바쳐 나아가 정당에 가입해야 할 것이다. 아마도 이는 그들이 일반 민중을 이끌고 가장 효과적으로 그 포부를 실행할 수 있는 길일 것이다. 대체로 다수 사람들과 자문하고, 그것을 납득하게 하여 보낸다는 방법을 매우 귀찮아하는 것은, 우리나라(일본) 정치가의 일상적인 일이다. 입헌정치라고 하는 것은, 원래가 번거로운 정치이다. 그러나 대신이 회의에서 자문하고, 의원이 인민에 호소하여, 충분히 토의를 거친다는 것에, 그 묘미도 특징도 있다. 그런데 일일이 중우와 상의해서는 결말이 나지 않는다며 소수정치를 주장하는 것은, 헌정의 근본사상과 맞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의 정당매도론은, 그들 정치가의 짧은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그와 똑같은 결점은 실은 정당에도 있다. 정당의 부패, 타락도, 사실은 대부분 이 결점에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정당인도 또한 일일이 인민의 의사에 호소하는 것을 귀찮게 여기고, 반대당과의 경쟁 등에 쫓겨, 자칫하면 매수, 청탁 등의 민첩한 권도(權道)에 기대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재조(在朝), 재야를 불문하고, 우리나라 정치가가 헌정의 요는 우회함에 있고, 이로(理路)를 철저히 함을 게을리하지 않는 데에 있으며, 군중과 상의하고 납득시키지 않으면 안되는 데에 있다는 각오만 되어 있으면, 저절로 정당정치도 행해지는 데에 이르며, 또한 정당 그 자체도 발달, 진보하는 데에 이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꼭 상류자가 분기(奮起)해야 한다. 상류자가 정당에 가입하여 크게 활동할 것을 바라 마지 않는 것이다.
만약 또한 그들이 취미, 경우 등의 점에서 정당에 들어가는 것을 원치 않는다면, 그들은 직접 정권 쟁탈의 소용돌이에 던져지는 것을 피하여, 마땅히 비평가의 지위에 서서 국론 지도의 임무를 맡는 것에 만족할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 나는 우리나라가 오늘날 추밀원, 귀족원에 반거(蟠踞)하는 일부 귀족 제공에게 만족스럽지 않은 점이 있다. 그들은 혹은 중의원에 대하여, 혹은 정부에 대하여, 독립적인 견해로써 국정을 논평하는 법률상의 권능을 부여받았다. 그 독립적인 견해로써 때로는 중의원의 망령됨을 바로잡고 때로는 정부의 잘못됨을 억제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그들의 국가에 대한 공적인 의무이다. 그렇지만, 이 법률상의 권능을 구실로 하여, 일마다 중의원이랑 정부와 논쟁을 벌여 국무의 진행을 방해하는 것은, 결코 국가가 그들에게 요구하는 바인 최상의 의무가 아니다. 그들은 국가를 위해서 어쩔수 없이 중의원 내지 정부의 비위(非違)와 싸우고 있다고 말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다툼의 원인은 필경 서로의 의견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단순한 의견 차이에 그치는 이상, 일단은 충분히 생각을 피력하고 크게 싸운다 해도, 결국에는 중의원 또는 정부에게 양보하는 것이 그들이 취해야 할 태도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국정은 늘 정체될 수밖에 없다. 원래 그들은 소수 계급으로서, 전국민의 대표자에 대항하여 독립된 한 세력이라는 높은 지위를 얻고 있다. 그것만으로 그들의 지위는, 적어도 도덕상 중대한 책임을 지고 있다. 그와 같은 중대한 지위는, 가볍게 그것을 남용할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평소의 경우에는, 늘 간간악악(侃侃諤諤)한 정론에 의해 국민과 정부를 일깨우면서도, 결국에는 그들에게 한 보 양보하는 것이 득책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드물게 일어나는 국가의 가장 중대한 문제에 대해서 이견을 가진 경우에는, 그때야말로 과감히 분기해야할 때이다. 평소 숨고 참으며 양보하는 그들이 때때로 분연히 일어나야, 국민들도 반성하고 또한 동정도 할 것이다. 최근 내가 귀족원과 추밀원 같이, 극히 미세한 문제에 대해서까지, 중의원과 다투거나, 정부와 다투거나 하는 모습에는, 물론 법률상으로는 하등 흠잡을 것이 아니지만, 우리들의 정치적 상식은, 오히려 그들의 경거망동에 대해서 자못 눈살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요컨대, 우리나라의 귀족은, 그 정계에서 활동함에 있어서, 확실히 그 취해야 할 방법을 잘못 알고 있다. 그리고 현재의 정당이 충분히 발달하지 못하는 것도, 일부적으로는 귀족의 태도의 정당하지 못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어찌되었든 ─ 가령 오늘날의 정당에 여러가지 결점이 있다고 하더라도 ─ 오늘날 때문에 초연내각주의를 시인하지 않을 수 없다는 이유가 존재하지 않는 것만은 명백하다. 아니, 도리어 초연내각주의의 출현은, 정당의 마땅한 진보를 방해하는 점에 있어서, 결국 국가를 위해서는 불행이다. 왜냐하면, 초연내각주의가 일시적이라도 실현되면, 정계에 활동해야 할 유위(有爲)의 인물들을 잠시라도 정당에서 멀어지게 만들고, 이렇게 상류와 하류의 소통의 길은 저해되어, 위로는 소수 정치의 폐해를 양산하고, 아래의 일반 정론을 경조부박함으로 흐르게 하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이 이번 정변을 보고, 오쿠마 내각보다도 데라우치 내각이 낫다든가, 데라우치 내각이라도 선정을 베풀면 괜찮다든가 말하며, 초연내각의 출현을 깊이 근심하지 않는 것은, 내가 심히 이상하게 여기는 바이다. 전 내각의 실정에 비교하여 다소 정계의 면목을 쇄신하는 작은 이익이 있다고 해도, 근본적으로 국운의 발전을 저해한다는 보이지 않는 큰 해악이 잠재함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우리들은 전후(前後) 양 내각의 현재-과거 비교론에 현혹되어, 초연내각의, 주의로서 절대 배척해야 할 것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4
초연내각이 주의에 있어서 헌정의 적임은 극히 명백하다. 선정을 베푸느냐 베풀지 않느냐의 기준에 따라, 초연내각의 변호를 시도하는 것은, 흡사 머리 위의 구름이 걷혔다든가, 허리의 통증이 나았다고 말하면서, 아편 음용의 효능을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일시적인 효능에 미혹되어 자연스레 덮쳐올 중독의 무서움을 잊어버려선 안된다. 이 점에 대해 우리들은, 일본 헌정의 발달상, 데라우치 내각의 출현을 매우 슬퍼하는 것이다. 또한 데라우치 내각을 출현시킨 작금의 정계의 형세에 대해, 매우 유감을 느끼는 것이다.
그렇지만,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초연내각은 헌정의 도상에 있어서 때때로 출현하는 것은 또한 절대로 그것을 면할 수가 없다. 무릇 정치상의 원칙은, 법률상의 원칙과 같이, 객관적인 형식적 표준이 있는 것이 아니므로, 예를 들면 저 헌법위반 즉 위헌이라는 문제는, 헌법의 해석상 대개 극히 명백하지만, 입헌정치의 상도에 거스른다는 소위 비입헌(非立憲)이라는 문제에 이르러서는, 무엇으로써 정치적 원칙을 삼을 것인가 하는 주관적 판단의 차이에 따라, 사람에 따라 반드시 일정하지는 않다. 당연히 초연내각을 헌정 운용상의 상도(常道)가 아니라고 하는 것은 오늘날 다수가 인정하는 정치적 원칙이라고 해도, 그에 대해서는 선의 또는 악의로 다양한 이의를 제기하는 자가 적지는 않다. 그리고 정치적 원칙의 확립은 원래 반복되어 이루어지는 바의 관행에 의해 저절로 정해지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나라와 같은 헌정 발전이 아직 유치한 나라에서는, 초연내각의 출현은, 희망하는 일이 아니라도, 사실상 전혀 불가능하지도 않다.
다만 우리들 역사가의 입장에서 보면, 앞에서도 서술한 것처럼, 데라우치 내각의 출현 같은 경우는, 정당내각주의가 그 확립을 이루기 위해 행하는 분전고투의 도상에서 하나의 작은 차질과 다름없는 것이어서, 당연히 대세 상으로는 깊이 우려할 바가 못된다. 그렇지만 세상에는, 데라우치 내각의 출현에 대하여 다양한 적극적 의의 부여를 하려는 자가 있다. 그 중에는 정말로 그들의 설에 따라 움직이고 있는 자도 있는 것으로 보이므로, 이에 그 한두 가지에 대해 약간 변론을 해보기로 한다.
신 초연내각 변호설 중 가장 그럴듯한 설은, 거국일치 내각이라는 것이다. 국가 이상 변고에 대처하여 거국일치의 강고한 내각을 만든다고 하는 일은, 이번 전란에 있어서 유럽 여러 나라의 유행이다. 나 혼자의 생각으로는, 가령 교전국의 하나였다고는 하나, 우리나라는 목하(目下)에 거국일치의 이름 아래 변체적(變體的) 정부를 만들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가령 한 걸음 양보해서 거국일치의 정부를 필요로 한다고 해도, 그것은 반드시 각 당파가 화친, 타협한 기초 위에 세워져야 한다. 그러면 만약 데라우치 수상에게 진짜 거국일치 내각을 조직할 의도가 있었다면, 먼저 오쿠마 후작으로부터 가토 자작과의 연립을 권장받았을 때, 또 하라, 이누카이[犬養] 두 사람도 거기에 끌어들여야 한다는 반대 제의를 후작에게 제기해야 했다. 그런데 쌀쌀맞게 오쿠마 후작의 요구를 거절하고, 적어도 먼저 가토 자작과의 연립을 배척한 이상, 어디에 거국일치 내각의 성립을 이룩할 기초가 있는가. 데라우치 백작은 뒤에 각각 3당 수령을 만나서 그 원조를 구하고, 후일 정계 분란의 시기에 거국일치를 깨는 책임을 그들에게 전가한다는 바탕을 만든 것은, 자못 교활한 수단으로, 진짜 거국일치의 성립을 깬 것은, 데라우치 백작이 오쿠마 후작의 요구를 거절한 그것임을 어찌 생각했겠는가. 지금 데라우치 내각이 만약 거국일치를 표방한다면, 이는 양머리를 내걸고 개고기를 파는 자와 다름없다. 둘째로 인재 내각을 표방하는 자가 있다. 정당내각을 배척하고 스스로 인재 내각을 표방하는 것은, 당계에 인재가 없고, 국가의 유용한 인재는 오직 자기들뿐이라는 것과 같고, 적어도 현재의 진용으로는 방관자인 우리들에게 오히려 골계의 느낌을 갖게 하는 것이나, 나는 잠시 이는 제쳐두고, 잠깐 데라우치 수상에 대해 말하면, 우리들은 결코 데라우치 백작을 정계의 이재(異才)라고 인정하지 않는다. 데라우치 백작의 조선에서의 시정에 대해서는, 훼예(毁譽) 각종의 판정이 있을 것이나, 데라우치 백작의 진가는, 식민지 정치가로서조차 미지수이다. 하물며 입헌정치가로서임에랴. 그러므로 백작을 정계의 위재(偉才)로 보아, 백작에 의해 진짜 국민의 행복에 보탬이 되는 정치를 시행할 것이라고 오늘날 기대하는 것은, 적어도 경솔한 판단을 면치 못한다. 어찌되었든 이번 내각은 종전의 내각에 비해 많은 인재를 모았다고 하는 것은 참월되지 않는다면 골계이다. 전 내각이 너무 실정을 저지른 덕에 그들은 겨우 국민의 냉혹한 비판을 면하고 있음에 지나지 않는다. 셋째로 정계의 혼란을 막기 위해 데라우치 내각의 출현이 필요하다고 하는 설도 있다. 정계 혼란의 경우에 일종의 초연내각의 출현을 보게 되는 일은, 서양에서도 전혀 예가 없는 것은 아니다. 평범한 방법으로 내각을 조직하기 어려운 경우, 원수가 그 가까운 자들을 들어서 일시 경과적인 정부를 만들고, 그것으로 하여금 잠시 정무 시행을 담당시키는 것이 가끔 있는 일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혼란은, 다수당 내각이 실정에 의해 그 지위를 이어가기 곤란하고, 게다가 그를 대신할 만한 신 내각의 조직도 또한 용이하지 않은 경우에 가장 많이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정은 오쿠마 내각에 몇 번이나 일어났다. 예를 들면 저 오우라[大浦] 사건의 실태와 같은 것이 그것이다. 당시 정부가 아무리 변명해도, 그 사건과 같은 경우는 확실히 정부가 총사직할 만한 문제였다. 그 경우 만약 오쿠마 내각이 책임을 지고 사직하는 자로서, 한편 정우회에서 뒤를 이을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하면, 거기에 일시 경과적인 초연내각을 성립할 여지는 있었다. 역시 관료는 그 때 매우 분기하여 오쿠마 내각의 공격에 여력을 남기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오쿠마 후작은 어떤 예상이 있었던건지, 결단코 관료에 넘겨주지 않으려고 하는 태도를 취하여, 서서히 정당에게 준비를 시키기 위해, 내각의 일부를 개조하여 눌러앉기를 결행했다. 이 눌러앉기의 속내가 실로 정당으로 하여금 훗날의 준비를 시키기 위함이었던 만큼, 관료들은 한시 바삐 쳐들어가서 정당의 기초가 굳어지는 것을 막으려고 애태웠다. 이는 그들이 온갖 유언비어를 퍼뜨려 오쿠마 후작의 눌러앉기를 나쁘게 말하고 다닌 이유일 것이다. 나는 원래 눌러앉기를 합당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원래가 정계가 혼란하여 달리 수습할 적임자가 없어서 천거된 오쿠마 후작이고, 지금 갑자기 그 지위를 떠나면 정계는 다시 야마모토 내각 붕괴 당시의 상태로 돌아갈 것이므로, 정계의 혼란을 수습한다는 점에서 말하자면, 어쩌면 눌러앉기도 또한 부득이하지 않았나 하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쨌든 간에, 개조 이후의 오쿠마 내각은 그 성질을 일변하고, 정계의 혼돈한 형세가 나아지고 정당의 준비가 되기까지의 일시 경과적인 성질을 가지는 내각이라고 보야아 할 것이 되었다. 그런데 이 개조 후의 내각도 또한 여러가지 실정을 거듭하여 머지 않아 그 직책에 남아있지 못하게 되었다. 오쿠마 후작은 노령으로 직책에서 버틸 수 없다고 말하며 원만 사직의 체재를 가장하고 있으나, 그렇지만 사실 외교상의 실패가 결국 그 직책에 있는 것을 허락하지 못한 데에 이른 것은 의심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관료는 다시 맹렬하게 운동을 개시했다. 그런데 오쿠마 후작은 어디까지나 정당정치주의를 관철하려고 생각한 것으로 보이며, 그에 대해 급거 3파 합동을 결행하게 하여, 무리하게 정당으로 하여금 대임 인수의 준비에 분주하도록 한 것이다. 정당 측에서도 또한 드디어 결심을 굳힌 것 같다. 그만큼 관료, 원로 일파도 결단코 최후의 결심을 할 필요를 느껴, 그 대결의 결과로서 데라우치 내각이 출현한 것이다. 그래서 보게 되면 데라우치 내각의 출현은 정당 박멸이라는 관료파의 열망에 의해 촉구되어 일어난 것으로, 따로 이 내각이 출현하지 않고서는 정계의 혼란은 피하기 어렵다고 할 정도로 중대한 이유는 없다고 믿는다. 지금 그들은 초연주의를 표방하여 정당내각을 배척하면서, 한편으로 몰래 손을 뻗쳐 정당의 조종을 획책하고, 그들과의 제휴를 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우리들 역사가의 입장에서 보면, 데라우치 내각의 출현은, 당연히 나와야 해서 나온 것이 아니고, 정권에 목마른 일부 관료가, 원로의 옹호와, 잘못된 고루한 헌법론에 힘입어, 대세를 역행하여 출현시킨 것에 다름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원래 나는 이 내각에 많은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머지 않아 마각을 드러내 일패도지할 것이라고 상상되나, 그렇지 않아도, 대세에 순응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도저히 영속할 만한 성질의 것이 아님은 의심할 수 없다. 그때는 또한 정계가 다시 대혼란이 일어나리라. 또다시 대세 역행의 해결을 취하려고 한다면, 그때야말로 헌정 옹호 등의 상서롭지 않은 운동도 일어날지 모른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것을 달관하자면 대세는 이미 결정되어 있다. 나는 세상의 동감하는 식자들을 향해, 간절히 이 한때의 변태(變態)에 혹하여 우리 헌정 발전의 대세를 오해하지 않기를 희망한다. 또 정당계의 여러 군자들을 향해서는, 가까운 장래에 반드시 찾아올 광명한 앞길을 예상하고 일시적인 변고에 실망, 낙담하지 말고, 크게 자중하고 견실히 준비할 것을 희망한다. 한때의 명리(名利)에 애가 타서 투구를 적의 문에 던지는 것은, 단지 우리나라 헌정의 진보를 해칠 뿐만 아니라, 정당 그 자체를 위해서도 결코 현명한 방법이 아니다. 또한 나는 일반 세상 사람들을 향해, 거국일치, 인재 망라 등의 미명에 현혹되어 국운을 소수자의 손에 맡기지 말고, 늘 정당에 대해 올바른 이해와 깊은 동정을 기울여줄 것을 희망한다.
─ 吉野作造, 「寺內內閣の出現に對する儼正批判」, (『吉野作造選集』 3, 岩波書店, 1995, pp.154-173.)
다음 편에 계속
耿君 編
# by | 2009/07/15 11:15 | 아시아에서 길을 잃다 | 트랙백 | 핑백(2)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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