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무지개, 해를 뚫다 03 - 요시노 사쿠조의 데라우치 내각 비판 (1)

지난 편에 이어서

이어지는 글은 도쿄 제국대학 교수였던 요시노 사쿠조[吉野作造]가 10월 22일에 탈고하여, 『중앙공론(中央公論)』 1916년 11월호에 발표한 「데라우치 내각의 출현에 대한 엄정비판[寺內內閣の出現に對する儼正批判]」이라는 제목의 글이다. 그는 민본주의(民本主義)를 주장하며, 국민이 요구하는 바를 정부가 실현해야 한다는 의회 정치의 이론을 주창한 인물이었다. 데라우치 초연내각이 등장하자 그는 이에 대한 비판을 글로써 가하였다. 이 글을 통해 데라우치 내각을 바라보는 당시의 비판적 시각을 확인할 수 있는데, 비단 새 내각과 관료, 원로에 대한 비판 뿐아니라, 정당 세력의 무기력함에 대한 비판도 담겨 있다. 다소 길지만 전문을 옮겨본다.

흰 무지개, 해를 뚫다 03
- 요시노 사쿠조의 데라우치 내각 비판 (1)

耿君이 삼가 엮음


1

순수한 역사가의 입장에서 달관하면, 데라우치 초연내각이 오늘날 출현한 것은, 흡사 탕탕(蕩蕩)한 조류에 대항하여 잔물결이 반격함과 같은 것으로, 헌정 발전의 대세를 염두에 두는 자가 당연히 문제조차 삼지 않는 것이다. 대저 우리나라(일본) 헌정 발전의 방향은, 대체적으로 이미 정해져 있다. 그 결국에 정착하게 될 목표에 대해서는 아직도 전도가 요원한 감이 있으나, 그래도 헌정 창설 당시의 정세와 오늘날을 비교하여 냉정하게 관찰하면, 우리들은 새삼스럽지만 진보 발전의 방향이 일정하고 불변함과 그 밀어붙이는 세력의 강대하고 훌륭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요즘 초연내각을 표방하고 나서는 것은, 필경 나무 한 그루로 큰 강의 둑이 터지는 것을 지탱하려고 하는 부류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우리나라 헌정의 발전이 현재 보는 대로 방향을 잡는 것이 좋은가 나쁜가 하는 논의는 다른 문제이지만, 어쨌든 다이쇼[大正]의 신시대에 이르러, 데라우치 백작을 추대하여 초연내각이 출현한 것은, 그 강건한 의기에 있어서는 대략 칭찬해 줄 일이라 해도, 필경 큰 수레에 맞서는 사마귀와 같이, 결국은 대세에 유린되어 후세의 역사에 연민을 남길 운명을 가진 것에 다름없다.
나는 지금까지 누차 고로(古老) 선배들에게 나아가, 헌정 창시 당시의 역사를 들었다. 당시 민간에는 서양의 문물에 심취한 나머지, 그 천박하고 피상적인 해석에 기반하여 매우 경박한 정론을 일삼는 자들이 많았다고 한다. 묘당(廟堂)1)의 신하들 다수는 그것을 국가의 깊은 근심으로 여겼고, 앞선 이로는 이와쿠라 공작2), 나중으로는 이토 공작3) 같은 이들이, 특히 열심히 외래 사상의 횡행을 제재하는 데에 고심하여, 우리 헌법의 제정 같은 일도, 요컨대 이러한 정신에 기반을 두어 만들어졌다고 하는 것이다. 혹 학자들 같은 경우는, 우리나라의 헌법상 영국식의 헌정 운용법을 인정하지 않은 근본적인 뜻은, 이미 메이지 14년(1881) 정변4) 때에 명백히 확립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이로써 당시 묘당 제공(諸公)의 고심을 상상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모두 그들이 국가를 생각하는 지극한 정성에서 나온 것임은, 나는 마땅히 의심하지 않는 바이다. 그만큼 또한 이러한 사상은 오늘날에도 일부 사회에서는, 엄연히 하나의 세력으로서 존재하고 있는 것 같다. 그 중에도 당시 직접적으로 이들 정변 와중에 뛰어다니며, 또한 오늘날에 잔존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그들 사상이 여전히 금과옥조로서 감사받고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헌법 발포 후의 정계의 대세는 어떻게 발전하였는가 하고 말하자면, 사실은 전혀 선배들의 고심과는 반대로, 그들의 희망을 거스르며 달려가고 있다. 보라, 의회 창립 후 수년간의 경험은, 초연내각을 가지고서는 도저히 헌정의 원만한 운영을 이룰 수 없음을 우리들에게 가르쳐주지 않는가. 그런데다 초연내각주의의 제1 주창자인 이토 공작은, 결국 스스로 하야하여 정당을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그 후 또다시 수년간의 경험은, 우리들에게 가르치기를 정당에도 또한 정부를 조직하는 적극적 지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정당과 관료가 서로 교대하며 조정에 서는 소위 가쓰라[桂]-사이온지[西園寺]의 타협 시대를 출현시킨 것이 아닌가. 그리고 다이쇼로 원호를 바꾼 직후의 정변5)에 이르러서는, 기요우라[淸浦] 내각의 유산(流産)에 의해 정당의 실력을 얕볼 수 없음을 명시했고, 장차 관료의 독자적인 힘으로는 도저히 정권을 장악할 수 없는 형세를 확립하려 하였다. 이리하여 우리나라 정계 발전의 대세는, 헌정 창설자의 의지에 반하여, 점차 정당주의로 향해가고 있는 것이다. 만약 이런 때에 또한 정당주의의 충분한 실현을 방해하는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정당 자체의 불완전함에 기인한다. 정당 그 자체가 조금 더 좋은 발달을 보이거나 했다면, 혹은 지금쯤은 정당정치주의가 우리나라에서 훌륭하게 확립되어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물어보자. 우리나라 정계 발전의 방향이 선배 원훈들의 뜻과 상반됨에 이른 것은, 대체 무엇에 의한 것인가. 이는 반드시 일반 국민이 원훈 제공과 같이 국가를 생각하는 마음이 두텁지 않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만약 나로 하여금 그 생각하는 바를 솔직히 말하게 한다면, 그것에는 두 가지 원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선배 제공이 서양식 입헌주의를 배척함에 따라 군권(君權)을 옹호할 수 있다고 한 근본 사상에 오류가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우선 민권을 바로 군권의 적으로 생각했다. 역시 서양 입헌제의 기원은 군권과 민권의 충돌에 있다. 또한 당시 우리나라의 경박한 민권론은 일견 군권에 대항하는 것 같이 보였다고 하는 사정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민권을 억압하는 것이 다름아닌 군권을 옹호신장하는 까닭이라고 하는 사상은, 궁극적으로 군민상친(君民相親)의 미풍에 의해 훈육된 우리 국민사상과 맞지 않는다. 이러한 종류의 사상은 오늘날에도 존재하고 있다고 보이며, 야마가타 공작이 오쿠마 후작의 가토 자작 추천에 반대한 이유를 서술한 말로서 두어 개 신문에 전하는 바 중에는, '정당의 수령된 사람을 세워서는 안된다 운운'하는 말이 있다. 오쿠마 후작 자신조차, 가토 자작을 추천함은 자작이 정당의 수령이기 때문이 아니고, 다만 국무에 능숙한 인사이기 때문이라 변명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정당의 수령이라는 자격에 대해서는 내각 조직의 대임을 맡기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민권을 군권의 적으로 보는 잘못된 생각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와 같은 사상이 오늘날 또한 뻔뻔하게 주창되고 있는 것은, 내가 심히 의아하게 여기는 바이다. 그러나 다행히 많은 식자들 사이에는, 점점 이 잘못된 사상은 퇴출되고 있다. 최근 정당주의가 활발해지고 있는 것도, 필경 군권과 민권이 화친하는 이상이 분명해진 결과이다. 민권을 적시하는 것은 군권이 아니고, 군권 옹호의 이름에 숨은 소수의 특권계급에 있다는 의의가 분명해진 결과에 다름 아니다. 다음으로 그들은 대권 옹호의 이름 아래 직접 옹호될 것은 대권 그 자체보다는, 오히려 자기 집안의 특별한 지위였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들은 원래 자기 집안의 지위를 옹호하기 위해 대권의 이름을 빌린 것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오랫동안 스스로 대권의 이름 아래 자기 가문의 특권을 옹호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형세로 또한 어쩔 수가 없다. 이상의 점이 해마다 명확해 져가므로, 국민이 스스로 소위 대권옹호론이란 것에 반감을 갖는 것은, 이 또한 당연한 일이다. 하물며 이 미명 아래 틀어박혀 정권 농단의 문벌을 만들고, 그 사이 왕왕 사곡방자(私曲放恣)를 감히 행하며 부끄러운 줄 모름에 있어서랴. 게다가 또 하나의 원인은, 일반국민의 식견의 진보에 따른 당연한 결과로서, 정치상 자주, 자유의 지위를 요구하는 풍조가 해마다 왕성해 지고 있는 점이다. 정치상의 자주, 자유가 반드시 존왕(尊王)의 대의를 등지지는 않는다는 것은, 여기서 장황하게 말할 것까지는 없다. 그리고 근대의 문명이, 한편으로 자주, 자유의 국민적 자각을 재촉한 것 또한 당연히 말할 것도 없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을 보면, 서양, 동양의 구분 없이, 실로 근대 문명의 바람에 닿는 것을 면할 수 없는 바, 이 점에 있어서 소위 정치적 자주, 자유는 근대인의 보편적 요구라 말해도 틀리지 않다. 이 의의에 있어서 입헌정치라는 것은, 그 최초의 발현은 서양에서 이루어졌어도, 그 근저는 동서의 구별이 없고, 소위 근대인 일반의 보편적인 요구에 존재하는 것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의 선배들은, 우리나라의 특별한 국체(國體)를 논거로 하여, 반드시 서양의 입헌정치 그대로에 의존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주장하였지만, 국체의 같고 다름에 따라 헌정 운용의 방법에 다소의 차이를 보임은 피할 수 없다 해도, 헌정의 근본 뜻이 인류의 보편적 요구에 기초를 두고, 나라의 동서에 따라 그 생각을 달리하는 것이 아니라는 이치는, 언제까지나 국민의 눈앞에서 가려질 수 없다. 이와 같이 우리나라의 헌법정치는, 그릇된 선배 제공의 생각에 반하여, 그 자연적이고 마땅한 진행을 평온히 계속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즉, 정당주의는, 헌정 운용상의 근본주의로서, 서양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에 있어서도 또한 점차 그 근거를 공고히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 주의의 완성에는, 또한 오랜 세월을 필요로 하고, 그동안 정당 그 자신에도 한층 더 진보 발달이 요구됨은 말할 것도 없다. 따라서 또한 우리들은 오늘날 우리나라의 정당의 지극히 유치하고 불완전함이, 대세의 순행을 뚜렷하게 어지럽히고 정당주의의 발전을 방해하며, 오히려 각종 반대 주의가 날뛰는 것을 허락하고 있음을 인정함에 주저하지 않지만, 그러나 대세의 귀추는 이미 명백하여 그것을 다툴 여지가 없으며, 작금의 변태이상(變態異象)은 필경 드넓게 넘쳐흐르는 대하장강(大河長江) 위의 한때 작은 파란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 단정짓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2

데라우치 내각의 출현이, 대세론의 견지에서 보아 거의 문제삼을 일이 아닌 것은, 전술한 바와 같다. 그렇지만 현재 정치의 득실을 생각하는 자의 입장에서 보면, 또한 그것을 세세히 관찰, 연구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아무리 작은 파란이라도, 대세에 역행해서 출현함은, 반드시 정계에 어느 정도의 결함이 있음을 말해주는 것으로, 헌정 진보의 촉진은 실로 그 결함들의 정체를 밝히고, 그것에 대해 혁신적 돌격을 시도함에 의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내가 보는 바에 의하면, 데라우치 내각의 출현을 허락하게 된 제1의 원인은, 의심할 것 없이 오쿠마 내각의 실정이다. 이는 거의 말할 것도 없다. 제2의 원인은 정당의 무기력이다. 특히 정우회의 연약한 태도이다. 오쿠마 내각이 그 실정의 결과 퇴진해야 하는 처지에 빠져(표면은 원만 사직이라고 가탁하지만), 게다가 가토 내각이 그 뒤를 이음에 차질이 있다고 하면, 어째서 정우회는 직접 정계의 표면에 나서는 결심과 노력을 하지 않았는가. 동지회에 대항하여 정계를 양단하며 그 절반을 점유하는 대정당으로서, 반대당의 실각을 맞아, 순순히 초연주의자들에게 활약의 기회를 넘겨준 것은, 필경 그들에게 비정당주의와 싸우는 공고한 결심히 없었던 결과이다. 하라 총재6)가 최근에 한 연설 중에, 혹은 "단순히 내각 구성원의 진용을 보았을 뿐인데, 바로 반대 성명을 내는 것 같은 일은, 매우 까닭 없는 일"이라든가, 또는 "당분간 그 정강과 내외에 대한 실제 시책을 잘 지켜본 다음에, 당의 태도를 결정해도 아직 늦지 않다"는 등의 말을 하는 것은, 완전 정당 존립의 기초를 스스로 부정하는 망론(妄論)이다. 이 점에 있어서 정우회의 이러한 태도는, 오쿠마 내각의 실정과 함께, 초연내각의 발생을 촉진한 양대 화근이라고 말해야 한다. 초연내각 발생의 셋째 원인으로서는, 또한 소위 관료 일파의 1, 2년 이래의 악전고투를 들지 않을 수 없다. 원래 그들은 따로 모여서 당을 이루지 않았다. 따라서 또한 결속하여 내각 장악의 음모를 꾸미는 일은 없었다는 등 변명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직접적인 동인이 무엇이든 간에, 유럽 전란의 원흉은 독일이었다는 것과 같은 의미로서, 오쿠마 내각의 전복은 주로 그들의 노력의 결과에 다름 없다. 대개 그들은 먼저 정권에 참여하고 안하고에 따라, 실제상 큰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 그래서 최근 정당주의가 더욱 왕성해지고, 점차 우리나라 헌정상의 고정적 원칙이 되는 추세를 보자, 아마도 그들의 마음속에 번민과 초조함을 갖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는 그들이 대세의 귀추 여하를 생각할 겨를 없이, 정권의 획득에 광분하여, 죽자사자 정당주의의 확립을 방해하는 데에 전력을 경도한 까닭이다. 물론 다수 중에는 성심 성의로 정당주의의 성행을 걱정해야 한다고 하는, 선의이긴 하나 고루한 견해에 따라 움직인 자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어쨌든, 그들은, 오쿠마 내각의 성립 이래 정당주의가 더욱 확립되려고 하는 경향이 있음에 놀라, 극력 이러한 추세를 뒤집으려고 노력한 것이다. 그 제1착의 수단으로서 그들은 지금까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먼저 오쿠마 내각의 전복을 재촉하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그 밖에 관료의 일파로 하여금, 최근 특히 활약의 희망을 높인 것은, 전쟁 이후 유럽의 형세에 관한 그들의 예측이다. 그들은 전시에 유럽의 일시적 이상상황을 보고, 경솔하게 전쟁 이후에 각국 정치 조직이 근본적으로 변혁할 것을 예상하고, 흡사 19세기 초엽의 대변란이 일대 정치적 혁명의 결과를 낳은 것과 마찬가지의 효과를, 이번 전란도 또한 가져올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이 변란에서 가장 큰 타격을 입는 것은 즉 정당정치, 입헌정치라고 간주하여, 이렇게 이제 장차 오려고 할 대세의 변혁을 눈앞에 두고, 그들은 맘속으로 몰래 우리들의 시대가 왔다고 기버하는 감정에 들떴으리라. 그 중에는 특히 또 이와 같은 설을 유포시켜 생각이 얕은 청년들의 마음을 유혹하려고 시도한 정치가도 있다고 들었다. 현재 이러한 식의 설명은 최근 2, 3개의 작은 신문에도 뜨문뜨문 보이는 것 같다. 그렇지만서도 19세기 초엽의 정치적 변혁은, 원래 자주, 자유의 자각이라는 사상 상의 일대 혁신과 더불어 일어난 것으로, 이 사상 자체가 또한 큰 변혁을 받지 않는 이상은, 이번의 전란이 아무리 사회의 각방면에 다대한 동요를 주었다 해도, 자주, 자유의 근본적 요구 위에 서는 정치조직까지도 더욱 중대한 변혁을 입을 것이라고는 결단코 상상할 수 없다. 종래의 정치조직이 전후 홀연히 옛 형태로 돌아가고, 또한 새로운 경험과 새로운 각오 위에 진보 발전을 이루어야 함은 극히 명백한 도리이다. 관료 일파가 당금 한때의 이상상황에 현혹되어, 정치조직의 근본적 변혁을 예상하는 것은, 만약 진짜로 그것을 주정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오히려 비웃을 만한 망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어쨌든, 이 망상에 의해 움직이고 있는 자들이 그들 중에 다소 존재하고 있는 것만은 의심할 수 없는 것 같다. 다음으로 넷째 원인으로는, 관료에 대한 원로의 옹호를 들지 않을 수 없다. 원로의 옹호 없이는, 관료 일파는 아무리 바둥거려도, 도저히 정권에 접근할 가망이 없다. 원래 원로는 신일본 건설의 공에 의해, 국민들 사이에서 크나큰 타성적(惰性的) 세력을 갖고 있음은 물론, 또한 궁중에서도 빼앗을 수 없는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 몇명이라 해도, 그들의 승인이 없으면, 오늘날 용이하게 정부를 만드는 일은 불가능하다. 이번 정변을 맞아, 정우회가 오쿠마 내각의 뒤를 이을 수 없었던 이유도, 필경은 원로가 하라 총재를 내각의 수반으로서 승인하지 않을 것이 명백했기 때문이리라. 오쿠마 후작이 예전에 처음으로 대명(大命)을 받은 때에 야마가타 공의 추천에 의한 것도, 또한 오쿠마 후작을 추대한 일에 따라 초음으로 동지회 등이 정부를 조직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원로의 의사 여하에 관련된 일이다. 이번 정변에서, 오쿠마 후작이 원로의 의지에 반하여 감히 가토 총재를 추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원로도 또한 단호히 데라우치 백작을 추천함으로써 그에 대항하는 것을 보더라도, 얼마나 그들이 관료를 옹호하고 정당을 배척하는 데에 열심인가를 알 수 있다. 오쿠마 후작도 어떤 견해가 있어서 이렇게까지 원로에게 반항하였는지 나는 아는 바가 없다. 좋은 뜻으로 풀의하자면, 혹은 내각 조직의 일에 원로가 늘 간섭해 오는 관례에 마지막으로 숨통을 끊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이 점에 관한 오쿠마 후작의 노력은 정계의 풍운이 급박함을 알려옴과 동시에 3파 합동을 촉구하여 정당을 준비시킨 일에서도 명백하다. 그에 앞서 후작이 데라우치 백작에게 가토 자작과의 제휴를 권장한 것도, 한편으로는 관료와의 타협인 것처럼 보여도, 다른 한편으로는 혹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걸음마중인 여당을 이렇게 해서 당분간 참풍비우(慘風悲雨)의 재앙에서 면하게 하려는 노파심에서 나온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모든 계책은 실패함에 이르렀기에, 원로의 반대가 있을 것을 각오하고 가토 자작을 추천한 후작의 태도에는, 좋든 나쁘든 엄청난 용기를 동반한 것은 의심할 수 없다. 어쨌든 간에 직접 천안(天顔)7)에 가까이 가서 이러한 다툼을 성단(聖斷)에 따른다는 일은, 우리나라에서는 극히 이상한 현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하자면, 처음부터 원로의 배척을 각오하고 독자적 의지를 상주한 오쿠마 후작의 결심도, 또한 상례를 깨고 수상의 추천과 반대의 봉답(奉答)을 한 원로의 결심도, 일의 시비 선악은 별도로 하고, 우리나라 최근의 역사에 있어서는 상당히 공전의 대사건이다. 그래서 나는 그만큼 또한 원로의 관료 옹호 의사가 강렬함을 생각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관료는 어쨌든 마침내 정권에 온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원로의 이러한 완강한 태도는, 오직 자기 집안의 낭당(郞黨)인 관료의 보호에 급급한 결과라고 보는 자가 있다면, 이 또한 아마도 정당한 견해는 아니다. 생각건대 이는 실로 관료 옹호라고 하기 보다도, 오히려 오쿠마 한 사람에 대한 강렬한 반감이 원로들로 하여금 이러한 태도로 나오게 했던 것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이에 나는 초연내각 출현의 최후의 이유로서 오쿠마에 대한 반감을 꼽고 싶다. 오쿠마 후작에 대한 원로의 반감도, 그것을 개인적인 감정만으로 돌리는 것은 또한 크게 핀트가 어긋난다. 물론 한 가지 이유는 그것이리라. 그렇지만 주된 이유로는 역시 주의 논쟁에 뿌리를 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나는 이번 정변의 대체적인 경과를 냉정히 관찰하고, 그것과 메이지 14년 정변을 비교하여, 마음 속으로 무한의 흥미를 느낀 것이다. (메이지) 14년 오쿠마 참의의 실각은, 한편으로는 말할 것도 없이 그 영국식 정치주의가 편협한 국체론과 싸워서 패배한 결과에 다름 없다. 당시 이와쿠라 공 같은 경우는, 천황의 대권을 심하게 동요시킨다고 여겨, 극력 오쿠마 참의의 배척을 주장하였다고 들어 알고 있다. 고루한 일부 헌법론자는, 오늘날 이에 당시의 정변을 가지고 우리나라 정치주의가 영국주의를 배척하는 것으로 확정된 명확한 증거로 보고, 당시 묘당 다수의 사견을 영원 불변의 원칙인 것 같이 간주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나는 역사가의 견지에서 본다면, 그것 또한 헌정사상 발달의 한 단계에 지나지 않고, 간혹 헌정의 근본 뜻이 그 당초에 있어서 다소 과장된 형태로 주장되어, 그 때문에 고루한 보수적 계급이 배척하는 바가 되었다는 각국에 으레 있는 상례를 반복한 것과 다름이 없다고 본다. 그렇기는 하나 당시 묘당 제공은 국가를 위해 중대한 큰 일이라 하여 결연히 오쿠마 배척을 위해 결속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번 정변은, 자세히 그 과정을 관찰하자면 실로 그와 완전 동일한 경로를 밟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왜냐하면, 오쿠마 내각의 2년 남짓 동안 한 일, 크고 작은 여러가지 시책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중에서도 헌정의 대국에서 보아 가장 중대하다 할 일은, 그가 극력 정당주의의 발달을 꾀한 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후작이 이를 위해 취한 방법은 매우 노골적이었다. 종래 조정에 들어선 정당으로서는 그밖에 정우회가 있는데, 정우회 내각은 또한 당연히 정당내각주의의 발달을 바라지 않는 것은 아니나, 대개 눈앞의 지위를 옹호함에 바빠서, 구세력과의 타협 소통을 싫어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오쿠마 내각은 백척간두에서 또 한 보를 내딛어 완전히 원로를 무시하려는 태도로 나왔다. 이에 대해 원로는, 한편으로는 그 거만하고 배은망덕한 태도에 격분하고, 또 한편으로는 (메이지) 14년 당시와 완전 똑같은 사상에 자극을 바당, 이에 결속하여 국가를 위해 오쿠마 내각이 취하는 주의를 분쇄하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결심한 것이 아닐까. 원로 일파가 1, 2년 이래 빈번히 오쿠마 내각을 저주하고, 그 타도에 나서며, 항례를 깨고 그 추천한 후계자까지 배척함에 이른 것은, 단순한 오쿠마에 대한 반감으로 돌릴 수는 없다고 믿는다.
이상과 같이 원인을 세어보면 한가지로 부족하나, 귀결되는 바는, 현재 정당의 무기력과, 원로 일파의 고루한 사상이, 초연내각의 출현을 촉진시킨 근본적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정당의 무기력함은 이제 시작된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정당의 운명에 관하여 매우 중대한 관계가 있는 이번 정변에 대해서 그들이 취하는 불철저한 태도를 보면, 나는 또한 그 무기력함에 질려버리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의미로는, 정당정치의 발달을 저해하는 것은 실로 정당 그 자신이라고 하는 것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정당정치의 발달을 실로 국가를 위해 희망하는 만큼 정당에 대해서 또한 크게 반성을 구해 마지 않는 것이다.


다음 편에 계속

耿君 編


== 편역자 주석 ==
1) 조정을 가리킴.
2)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
3)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4) 메이지 14년(1881) 당시 정부는 국회 개설 문제를 놓고 견해가 분열되어 있었다. 구로다 기요타카는 국회 개설에 반대했고, 이토 히로부미는 독일식 헌법과 비정당 내각제를 구상하였으나, 오쿠마 시게노부는 영국식 헌법, 정당내각제, 그리고 1883년 국회 조기 개설 등을 주장했다. 이런 가운데 1881년 7월, 홋카이도 개척사 관유물 불하 사건이 일어나 구로다 등 사쓰마 계열에 대한 의혹이 증폭되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사건이 폭로된 것이 민권운동 측과 손을 잡은 오쿠마의 음모라는 설이 확산되면서, 결국 오쿠마가 정부로부터 추방당했고, 정부는 대신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10년 뒤에 국회를 개설할 것을 약속하였다. 이것이 메이지 14년 정변이다.
5) 메이지 천황이 사망하고 새 천황이 즉위하여 연호를 다이쇼로 바꿀 무렵의 다이쇼 정변을 말한다. 이때 가쓰라 정권은 헌정 옹호를 주장하는 민간의 압력을 버티지 못하고 결국 총사퇴하였다.
6) 하라 다카시[原敬].
7) 천황의 얼굴.

by 耿君 | 2009/07/13 17:36 | 아시아에서 길을 잃다 | 트랙백 | 핑백(2) | 덧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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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겼으나, 군부와 원로, 번벌 인사들은 시대를 거슬러 다시금 초연내각을 구성하려 하였다. 물론 이에 대한 언론인과 지식인, 정치인들의 반발은 강했다. 다음 편에 계속 耿君 編 == 편역자 주석 == 1) 천황이 있는 황궁으로 들어가는 일. 2) 천황을 가리킴. 3)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4) 오야마 이와오[大山巖]. ...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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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편에 이어서요시노 사쿠조의 「데라우치 내각의 출현에 대한 엄정비판」 나머지 뒷부분이다. 앞서서는 일본 헌정의 대세가 정당주의이고, 초연내각 수립은 이에 대한 일시적인 반동이라는 것이 ... more

Commented by rumic71 at 2009/07/13 17:41
영국법은 싫으니까 프로이센 법을 카피!
Commented by 耿君 at 2009/07/14 10:05
글 올린지 5분 만에 위와 같은 댓글을 다신 거 보니 마지막 각주만 읽으셨군요! ㅋㅋ
Commented by rumic71 at 2009/07/14 14:32
아뇨 반대로 윗부분만 읽었습니다^^
Commented by Allenait at 2009/07/13 21:30
결국 일본은 대륙법계로 가는군요
Commented by 耿君 at 2009/07/14 10:07
요시다 사쿠조는 그것이 일시적인 흐름일 뿐 결국 일본도 세계의 대세를 따르게 된다고 말하고 있지요.
Commented at 2009/07/14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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