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07월 07일
흰 무지개, 해를 뚫다 02 - 총리가 된 데라우치
지난 편에 이어서
데라우치에게 총리직 제안을 했다가 협상에 실패한 오쿠마는 이번에는 동지회의 가토 다카아키를 총리 수반으로 하는 새로운 내각 구성을 도모했다. 당시 동지회는 중의원에서 최다 의석을 보유한 여당이었고, 그러한 여당의 당수가 총리에 취임하는 것은 이른바 '헌정(憲政)의 상도(常道)'라 하여, 정치인과 지식인들 사이에서 헌정의 원칙으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야마가타 아리토모를 비롯한 여러 원로들은 그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흰 무지개, 해를 뚫다 02
- 총리가 된 데라우치
耿君이 삼가 엮음
『원수 데라우치 백작전』에서는 오쿠마 총리가 사임한 직후, 원로들이 데라우치를 총리로 내세우고, 데라우치가 내각을 구성하게 되는 과정을 아래와 같이 전하고 있다.
오쿠마가 사표를 제출하자 궁중에서는 바로 원로회의가 열렸고, 데라우치는 신속하게 총리로 지명되었다. 이 긴급한 원로회의에 대하여 『오사카 아사히 신문[大阪朝日新聞]』의 주필 도리이 소센[鳥居素川]은 1916년 10월 6일자 신문 사설 「후계자는 데라우치 백작[後繼者は寺內伯]」에서, 원로들의 참내 시각을 자세히 조사한 뒤, 이를 통해 원로들이 처음부터 데라우치를 수상으로 만들기 위해 일을 꾸몄다고 하였으며, 궁중과 정부를 농단한 원로를 '신하답지 못하다[不臣]'고 공격하였다. 그리고 『호치 신문[報知新聞]』의 주필 스자키 요시사부로[須崎芳三郞]는 원로들이 '궁중으로 틈입(闖入)'한 사건을 전격 보도하였다. 정부는 원로의 궁중 틈입을 보도한 호치 신문에 신문지법 위반죄를 적용하여 두 차례의 발매 금지 처분을 내렸다.(朝日新聞百年史編修委員會 編, 『朝日新聞社史 大正·昭和戰前編』, 朝日新聞社, 1991, pp.69-70.)
군부, 번벌관료, 원로들을 배경으로 한 이른바 데라우치 초연내각(超然內閣)은 이렇게 등장하였다. 초연내각이란 내각 구성과 행정권의 행사, 책임 추궁 등에 대하여 의회와 정당으로부터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고, 오직 천황에게만 정치의 책임을 지는 내각을 가리킨다. 초연내각의 '초연'이라는 말이 정계에서 처음 등장한 것은 1889년 2월 12일, 당시 수상이던 구로다 기요타카[黑田淸隆]가 로쿠메이칸[鹿鳴館]에서 열린 지방 장관회의에 참석하여 행한 연설에서였다. 그 내용의 일부를 아래에 옮긴다.
그 후로 이러한 원칙에 입각한 '초연내각'이 등장하였다. 특정 당파에 치우치지 않는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합당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결국 정당과 의회가 대표하는 민의(民意)를 떠나 초연하겠다는 의미도 된다. 그리고 초연내각이 특정 정파에 편당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보이고는 있으나, 그 실제 내각 구성원은 대개 원로들이나 번벌 관료들이 대부분이었다. 의회에서의 정당의 힘이 커지면서 초연내각은 점차 설 자리를 잃어갔고, 이토 히로부미는 초연내각의 원칙 고수를 포기하고 입헌정우회를 설립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당시 정계 인사들이나 지식인들은 초연내각이라는 개념은 이제 구태의연한 것이라 여겼으나, 군부와 원로, 번벌 인사들은 시대를 거슬러 다시금 초연내각을 구성하려 하였다. 물론 이에 대한 언론인과 지식인, 정치인들의 반발은 강했다.
다음 편에 계속
== 편역자 주석 ==
1) 천황이 있는 황궁으로 들어가는 일.
2) 천황을 가리킴.
3)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4) 오야마 이와오[大山巖].
5) 마쓰카타 마사요시[松方正義].
6) 사이온지 긴모치[西園寺公望].
7) 천황의 얼굴.
8) 몸을 돌보지 않고 나라에 충성함.
9) 고토 신페이[後藤新平].
10) 덴 겐지로[田健治郞].
11) 오시마 겐이치[大島健一].
12) 가토 도모사부로[加藤友三郞].
13) 시데하라 기주로[幣原喜重郞].
데라우치에게 총리직 제안을 했다가 협상에 실패한 오쿠마는 이번에는 동지회의 가토 다카아키를 총리 수반으로 하는 새로운 내각 구성을 도모했다. 당시 동지회는 중의원에서 최다 의석을 보유한 여당이었고, 그러한 여당의 당수가 총리에 취임하는 것은 이른바 '헌정(憲政)의 상도(常道)'라 하여, 정치인과 지식인들 사이에서 헌정의 원칙으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야마가타 아리토모를 비롯한 여러 원로들은 그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흰 무지개, 해를 뚫다 02
- 총리가 된 데라우치
耿君이 삼가 엮음
『원수 데라우치 백작전』에서는 오쿠마 총리가 사임한 직후, 원로들이 데라우치를 총리로 내세우고, 데라우치가 내각을 구성하게 되는 과정을 아래와 같이 전하고 있다.
그렇지만 정국은 꽉 막힌 채로 그칠 줄을 몰랐다. 10월에 들어서부터는 정해(政海)의 풍운이 급변하고 정객들이 종횡으로 분주하였다. 사람들로 하여금 시국이 더욱 절박해짐을 상상하게 한다. 과연 10월 4일 오전 10시 반, 오쿠마 수상은 참내(參內)1)하여 지존(至尊)2)을 배알하고 늙은 몸이 일을 맡지 못함을 이유로 사표를 받들어 바쳤다.
오쿠마 후작이 퇴궐한 뒤, 폐하는 급히 야마가타3), 오야마4), 마쓰카타5), 사이온지6)의 네 원로를 부르시고 어전회의를 여시니 하문하심에 응하여 마쓰카타 후작이 먼저 데라우치 백작을 내각 후계자로 추천하고, 사이온지 후작이 이에 동조하여 뭇 의견이 이것으로 결정되었다. 오후 2시, 데라우치 백작의 참내를 명령하셨고, 3시가 지나 백작은 공손히 몸을 굽히며 천안(天顔)7)을 지척에서 뵈었다. 이때 내각 조직의 대명은 내려지지 않았다. 백작은 황송해하며 아뢰기를, "불초 미력하여 그 중임을 견디지 못할 것이나 만약 수일의 숙고할 시간을 주신다면, 혹은 비궁(匪躬)8)의 절개를 다할 수 있을 것"이라고 봉답하였고, 폐하는 기쁘게 받아들이시고 그 유예를 내려주셨다. 오후 4시, 백작이 저택에 돌아오자 정객들이 서로 전후하며 내방하였다. 평소에는 객실이 늘 너무 넓은 감이 있었던 저택도 갑자기 협소해졌고, 문 밖에는 신문기자, 사진사 등이 끊이지 않고 배회하여 느닷없이 복잡함의 극에 달했다. 이때에 이르기까지 백작은 아직 일찍이 각료 한 사람조차 물색하지 않았다. 이로써 신문의 호외가 한 차례 시중(市中)에 살포되자 와서 축하하는 사람들의 차마(車馬)가 이어져서 초저녁에 이르렀다. 그런데 백작은 2일 밤부터 위장을 상하여 3일에는 주치의의 권고에 따라 종일 금식하고 병상에 누워있었다. 4일, 부르심에 따라 병을 무릅쓰고 참내하실 정도의 상태였으므로 퇴궐한 뒤 매우 피로를 느껴서 초저녁에 겨우 야마가타 노공(老公)을 춘산장(椿山莊)에 초대하여 내각 조직의 단서를 열어놓았음에 지나지 않았다.
10월 5일, 백작은 병환 직후의 피로가 아직 가시지 않았기 때문에 종일 집에 있으며 문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내각 구성원의 면면은 아직 결정되지 않고 다만 어림짐작과 억측이 신문지상에 전해질 뿐이었다. 6일에 이르러 백작의 병세가 대략 치유되었으므로 이에 비로소 각료 물색에 착수했다. 7일 저녁에 이르러 각 성 대신의 진용이 대강 결정되었다. 즉 백작 스스로는 내각 총리대신에 대장대신을 겸직하고, 겸하여 임시 외무대신의 직책을 맡으며 고토 남작9)은 내무대신, 덴 남작10)은 체신대신, 나카쇼지 렌[仲小路廉] 씨는 농상무대신, 오카다 료헤이[岡田良平] 씨는 문부대신, 마쓰무로 이타스[松室致] 씨는 사법대신, 쇼다 가즈에[勝田主計] 씨는 대장성 차관, 아리마쓰 히데요시[有松英義] 씨는 법제국 장관, 고다마 히데오[兒玉秀雄] 백작은 내각 서기관장으로 내정되었다. 오시마11) 육군대신, 가토12) 해군대신, 시데하라13) 외무성 차관 등은 유임하기로 결정했다. 내각 구성원의 진용이 결정되자 8일 오전 7시, 백작은 먼저 자동차를 타고 각 방면을 돌아다니며 수상 취임에 관하여 은근(慇懃)한 인사를 하고, 저녁때 귀가하였으며, 9일 오전 10시, 백작은 먼저 자동차를 타고 천궐(天闕)에 입조하고 내대신부(內大臣府)에서 각 원로를 만나 구체적으로 내각 조직의 경과를 말하였다. 오전 11시, 어전에 나아가 공손히 대명을 받들겠다는 봉답을 하였고, 오후 2시에 궁중에서 각 대신의 친임식을 거행하였으며, 퇴궐한 뒤 각 대신은 내각 관방(官房)에 모여서 서로 취임 인사를 교환했다. 이에 비로소 데라우치 내각은 성립되었다.
─ 黑田甲子郞, 『元帥寺內伯爵傳』, 元帥寺內伯爵傳記編纂所, 1920, pp.816-818.
오쿠마가 사표를 제출하자 궁중에서는 바로 원로회의가 열렸고, 데라우치는 신속하게 총리로 지명되었다. 이 긴급한 원로회의에 대하여 『오사카 아사히 신문[大阪朝日新聞]』의 주필 도리이 소센[鳥居素川]은 1916년 10월 6일자 신문 사설 「후계자는 데라우치 백작[後繼者は寺內伯]」에서, 원로들의 참내 시각을 자세히 조사한 뒤, 이를 통해 원로들이 처음부터 데라우치를 수상으로 만들기 위해 일을 꾸몄다고 하였으며, 궁중과 정부를 농단한 원로를 '신하답지 못하다[不臣]'고 공격하였다. 그리고 『호치 신문[報知新聞]』의 주필 스자키 요시사부로[須崎芳三郞]는 원로들이 '궁중으로 틈입(闖入)'한 사건을 전격 보도하였다. 정부는 원로의 궁중 틈입을 보도한 호치 신문에 신문지법 위반죄를 적용하여 두 차례의 발매 금지 처분을 내렸다.(朝日新聞百年史編修委員會 編, 『朝日新聞社史 大正·昭和戰前編』, 朝日新聞社, 1991, pp.69-70.)
군부, 번벌관료, 원로들을 배경으로 한 이른바 데라우치 초연내각(超然內閣)은 이렇게 등장하였다. 초연내각이란 내각 구성과 행정권의 행사, 책임 추궁 등에 대하여 의회와 정당으로부터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고, 오직 천황에게만 정치의 책임을 지는 내각을 가리킨다. 초연내각의 '초연'이라는 말이 정계에서 처음 등장한 것은 1889년 2월 12일, 당시 수상이던 구로다 기요타카[黑田淸隆]가 로쿠메이칸[鹿鳴館]에서 열린 지방 장관회의에 참석하여 행한 연설에서였다. 그 내용의 일부를 아래에 옮긴다.
제국의회(帝國議會)가 다음 해에 개설될 것이고, 그때가 되어 의원으로 뽑힌 사람들이 각자 충실히 국사(國事)에 참여하고 상하화융(上下和融)의 미(美)를 이룸으로써 천황의 뜻에 봉답할 것을 간절히 바라지만, 만약 그들이 경쟁하고 날뛰어서 분란을 일삼아 의회의 체면을 떨어뜨리고 신뢰를 잃게 되면 입헌(立憲)의 뜻을 밝히기 위해 지방관들이 뜻을 모아 유도, 계발하기를 원한다. …… 헌법은 감히 신민(臣民)의 한 마디를 용납하지 않음은 물론이나, 다만 시정상(施政上)의 의견은 사람들이 그 주장을 달리 하는데, 뜻이 같은 사람들이 단결을 해서 소위 정당(政黨)이란 것이 사회에 존립하게 됨이 어쩔 수 없는 정세라 하더라도, 정부는 늘 일정한 방향을 취하고 초연(超然)하게 정당의 바깥에 서서 지공지정(至公至正)의 도(道)에 있어야 한다. ……
─ 阿部照哉·佐藤幸治·宮田豊 編, 『憲法資料集』, 有信堂, 1971. pp.478-479.
그 후로 이러한 원칙에 입각한 '초연내각'이 등장하였다. 특정 당파에 치우치지 않는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합당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결국 정당과 의회가 대표하는 민의(民意)를 떠나 초연하겠다는 의미도 된다. 그리고 초연내각이 특정 정파에 편당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보이고는 있으나, 그 실제 내각 구성원은 대개 원로들이나 번벌 관료들이 대부분이었다. 의회에서의 정당의 힘이 커지면서 초연내각은 점차 설 자리를 잃어갔고, 이토 히로부미는 초연내각의 원칙 고수를 포기하고 입헌정우회를 설립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당시 정계 인사들이나 지식인들은 초연내각이라는 개념은 이제 구태의연한 것이라 여겼으나, 군부와 원로, 번벌 인사들은 시대를 거슬러 다시금 초연내각을 구성하려 하였다. 물론 이에 대한 언론인과 지식인, 정치인들의 반발은 강했다.
다음 편에 계속
耿君 編
== 편역자 주석 ==
1) 천황이 있는 황궁으로 들어가는 일.
2) 천황을 가리킴.
3)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4) 오야마 이와오[大山巖].
5) 마쓰카타 마사요시[松方正義].
6) 사이온지 긴모치[西園寺公望].
7) 천황의 얼굴.
8) 몸을 돌보지 않고 나라에 충성함.
9) 고토 신페이[後藤新平].
10) 덴 겐지로[田健治郞].
11) 오시마 겐이치[大島健一].
12) 가토 도모사부로[加藤友三郞].
13) 시데하라 기주로[幣原喜重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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