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월사기(大越史記)

1272년, 베트남 황제인 진 성종(陳聖宗)의 명을 받든 한림원 학사 겸 국사원 감수(翰林院學士兼國史院監修) 여문휴(黎文休)는 『대월사기(大越史記)』 30권을 '중수(重修)'하여 바쳤다. 여문휴가 쓴 『대월사기』는 남월(南越)의 조 무제(趙武帝), 즉 조타(趙佗)의 재위기부터 이조(李朝)의 마지막 황제인 이 소황(李昭皇)에 이르는 시기인 기원전 207년~1225년 동안의 역사 기록을 다룬 것이라고 한다. '중수'되었다는 기록에 따라 학자들은 『대월사기』가 기존의 역사서를 기초로 하여 작성되었고, 그것이 1232년 진사에 합격한 진주보(陳周普)가 쓴 『월지(越志)』일 것이라고 보고 있다.

1257년, 베트남은 몽골의 1차 침입을 받게 된다. 몽골군은 베트남의 수도 승룡(昇龍)을 함락시켰지만, 더운 날씨의 영향도 있었고 본래 목표가 점령이 아닌 초항(招降)이었기 때문에 곧 퇴각하게 된다. 베트남군은 퇴각을 준비하는 몽골군을 격파하여 결국 그들을 물리치고 수도를 탈환했다. 이후 베트남은 몽골에 3년에 1번 공물을 바치게 해달라고 요청하였고, 몽골은 이를 받아들이며 1261년에 베트남의 당시 군주인 진 성종에게 '안남국왕(安南國王)'의 호칭을 내려 책봉한다. 이로써 양국 관계는 정상화에 놓이면서 사신의 교류가 이루어진다.

하지만 그 이후로 몽골의 베트남에 대한 간섭은 서서히 정도를 더해갔다. 1262년, 몽골은 3년에 공납 1번이라는 원칙을 1263년부터 시행하고, 유생, 의사, 음양과 점복에 능한 사람을 3명 선발해 올리며, 소합유(蘇合油), 광향(光香), 금, 은, 주사(朱砂), 침향(沈香), 단향(檀香), 무소 뿔, 대모(玳瑁), 진주, 상아, 면(綿), 백자 잔 등의 공물을 바칠 것을 요구했다. 또한 다루가치를 파견해 베트남 안을 왕래하게 했다. 1266년에는 6사(六事)라 하여, 1) 군장이 직접 입조할 것, 2) 자제들을 인질로 보낼 것, 3) 민호(民戶)를 편제할 것, 4) 군역을 제공할 것, 5) 세금을 납부할 것, 그리고 6) 다루가치를 설치하여 통치하게 할 것 등의 일들을 베트남에 요구하였다. 진 성종은 이상의 여러 요구들을 들어주면서도, 어떤 요구는 적당히 면피하였는데, 특히 6사에서 첫번째, '군장이 직접 입조할 것'이라는 요구사항은 어떻게든 핑계를 대어 절대적으로 회피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베트남 측에서는 언제 몽골이 다시 침입해올지 모른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특히 몽골의 1차 침입 당시 진 태종(陳太宗)의 황태자로서 전쟁에 참여했고, 그 이듬해인 1258년에 태종으로부터 황위를 물려받은 진 성종은 몽골의 침입을 막아내고 나라를 온전히 유지해내는 일을 고민하게 되었다. 바로 이때 여문휴는 베트남의 옛 역사를 통해서 어떻게 하면 외적을 물리치고 왕조를 보전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고민을 해결하고자 했고, 그 결과물이 바로 『대월사기』였던 것이다. 『대월사기』의 첫 부분, 즉 베트남 역사 서술의 시작을 한 고조에게 대등한 태도를 취하여 황제를 칭한 남월의 조타로 시작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가 『대월사기』에서 일관되게 보여주는 베트남 역사의 테마는 바로 '베트남 왕조의 독립성과 중국과의 대등성'이었다.

『대월사기』는 이후 1479년에 오사련(吳士連)이 『대월사기전서(大越史記全書)』 15권을 편찬할 때 그 기초로 삼고 참조하였으나, 이후 『대월사기』는 산일되어 전하지 않고, 그 내용은 『대월사기전서』에 포함되는 식으로 오늘날까지 전하게 되었다.

* 참고문헌
宋濂, 『元史』. (中華書局 표점본, 1976)
陳荊和 編校, 『校合本 大越史記全書 (上)』, 東京大學東洋文化硏究所所屬東洋學文獻センター, 1984.
劉仁善, 「전근대 베트남人의 歷史認識 ─黎文休와 吳士連을 중심으로─」, 『東洋史學硏究』 73, 東洋史學會, 2001.

耿君 識

by 耿君 | 2009/07/04 14:43 | 개인적 취향의 단어장 | 트랙백 | 덧글(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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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sgi at 2009/07/04 15:01
陣聖宗→陳聖宗.
Commented by 耿君 at 2009/07/04 15:02
수정했습니다.
Commented by sgi at 2009/07/04 15:32
근데 월남사람은 인명을 어떻게 적어야 하죠?

가령 여문휴로 적어야 할지 레반흐우로 적어야 할지...
Commented by 耿君 at 2009/07/04 15:33
관련해서 제 나름의 원칙을 곧 포스팅하겠습니다.
Commented by Allenait at 2009/07/04 16:41
음.. 그런 면에서 역사서가 한몫 하는군요
Commented by 耿君 at 2009/07/04 21:47
역사는 정치의 도구인 겁니다? ㅋ
Commented by 自重自愛 at 2009/07/04 19:57
우리나라도 더운 지방에 있었으면 6사를 적당히 피할 수 있었을텐데. -_-;;;;
Commented by 耿君 at 2009/07/04 21:48
더운 지방의 문제는 아니고요, 왕은 병을 핑계로 안가고 대신 왕족이나 사신을 보냈습니다. 자꾸 말을 안들은 관계로 결국 베트남은 2, 3차 침략을 맞게 됩니다.
Commented by 自重自愛 at 2009/07/04 22:04
뭐, 그래도 북쪽에서 쳐들어오는 적을 맞아 싸우기에는 한반도보다 인도차이나 반도가 더 유리하지 않을지.....? -_-;;;;
Commented by 초록불 at 2009/07/04 22:45
뭐, 그쪽에서는 우리도 추운 동네 살았으면 적군을 막는데 더 유리했을 텐데... 그런 이야기 할 겁니다.
Commented by 소하 at 2009/07/04 23:30
저도 <대월사기>를 구할 적에 중국에서 정리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일본에서 정리하여 출판한 서적이더군요. 그런데 남월왕 조타나 중국 관련 사건을 제외하고는 읽어내기가 힘들더군요. 저에겐 <일본서기>만큼 어려운 것 같습니다.
Commented by 耿君 at 2009/07/05 15:35
대월사기전서는 일본 도쿄대학 동양문화연구소에서 정리한 것이 있고, 베트남에서 정리한 것도 있더군요. 그래도 문장이 한문 구조를 잘 따르고 있어서 해석 자체는 쉬운 것 같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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