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06월 30일
흰 무지개, 해를 뚫다 01 - 데라우치, 총리 제의를 받다
위키백과 문서를 보면, 또는 역사 개설서들을 읽고 있으면, 과거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서술을 접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간혹 '어? 정말 그런 일이 있었나?' 하는 의문이 드는 구절을 발견하게 되고, 그 근거가 무엇인지 궁금해지게 된다. 또 어떤 책에서는 특정 사건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는데, 다른 책을 보면 저렇게 설명되어 있는 등, 책마다 시각이 다른 경우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혼란과 궁금증을 해결하는 가장 깔끔한 방책은 바로 소스로 돌아가는 일이다. 이번 포스팅은 吉野作造 vs 浪人會에서 다루었던 내용들을 새로이 구성하여, 소스가 되는 사료들을 엮은 글이다. 물론 필자의 능력 탓에 가장 근원적인 소스까지 탐색하기는 어려울 수도 있으나, 최대한 그 '소문의 근원'에 가깝게 가려고 노력하고자 하였다. 자료의 나열이라는 글의 성격 때문에 글이 다소 재미없을 수 있으니 양해를 구하는 바이다.
흰 무지개, 해를 뚫다 01
- 데라우치, 총리 제의를 받다
耿君이 삼가 엮음
1914년 총리가 된 오쿠마 시게노부는 오쿠마 내각을 결성하였으나, 1915년 총선거 관련 비리로 인해 내각 총사퇴의 위기를 맞이한다. 가까스로 위기를 벗어난 오쿠마 내각은 일부 인사를 경질한 '내각 개조'를 단행하지만, 오히려 이로 인해 정치력은 더 하락했고, 사람들은 이 내각을 '오후 내각', '와세다 내각'이라며 비난했고, 귀족원 의원들, 민간 언론과 타 정당 의원들은 내각 타도를 주장했다. 원로들 또한 오쿠마 내각이 2개 사단 증설, 의회에서의 정우회 타도 등 요청한 사항들을 달성하였기 때문에 이제 더이상 쓸모가 없다고 여겼고, 그 대신 원로측 인사이자 군부 세력의 인물이었던 당시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를 차기 총리로 염두에 두고 있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오쿠마는 결국 용퇴를 결심하고, 데라우치 마사타케에게 교섭을 시도하여 그를 자신의 총리 후임자로 삼으려고 하였다.
아래의 글은 구로다 고시로[黑田甲子郞]가 쓴 『원수 데라우치 백작전[元帥寺內伯爵傳]』의 일부분이다. 이를 통해 데라우치가 원로와 군부에게 어떤 인물이었고, 또 오쿠마는 어떻게 데라우치에게 총리 후임 자리를 부탁하는지 그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이 책은 데라우치의 전기인만큼 데라우치를 높이거나 미화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그 점 참고하시기를 바란다.
흰 무지개, 해를 뚫다 01
- 데라우치, 총리 제의를 받다
耿君이 삼가 엮음
1914년 총리가 된 오쿠마 시게노부는 오쿠마 내각을 결성하였으나, 1915년 총선거 관련 비리로 인해 내각 총사퇴의 위기를 맞이한다. 가까스로 위기를 벗어난 오쿠마 내각은 일부 인사를 경질한 '내각 개조'를 단행하지만, 오히려 이로 인해 정치력은 더 하락했고, 사람들은 이 내각을 '오후 내각', '와세다 내각'이라며 비난했고, 귀족원 의원들, 민간 언론과 타 정당 의원들은 내각 타도를 주장했다. 원로들 또한 오쿠마 내각이 2개 사단 증설, 의회에서의 정우회 타도 등 요청한 사항들을 달성하였기 때문에 이제 더이상 쓸모가 없다고 여겼고, 그 대신 원로측 인사이자 군부 세력의 인물이었던 당시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를 차기 총리로 염두에 두고 있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오쿠마는 결국 용퇴를 결심하고, 데라우치 마사타케에게 교섭을 시도하여 그를 자신의 총리 후임자로 삼으려고 하였다.
아래의 글은 구로다 고시로[黑田甲子郞]가 쓴 『원수 데라우치 백작전[元帥寺內伯爵傳]』의 일부분이다. 이를 통해 데라우치가 원로와 군부에게 어떤 인물이었고, 또 오쿠마는 어떻게 데라우치에게 총리 후임 자리를 부탁하는지 그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이 책은 데라우치의 전기인만큼 데라우치를 높이거나 미화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그 점 참고하시기를 바란다.
야마모토 내각1)은 직접 관계가 없는 지멘스 사건2) 때문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오쿠마 노후(老侯)3)는 그 뒤를 이어 내각의 중요한 임무를 맡아 천하로 하여금 노후가 나오지 않으면 창생을 어찌할 것인가 하고 구가하게 하였다. 후작은 왕정 유신의 원훈으로 월내 충군애국의 정치가임에 틀림없고 가슴속의 경륜과 현하(懸河)의 변설을 모두 갖춘 일세의 영웅이다. 안으로는 중의원을 해산하고 증사(增師) 문제4)를 단행하고 밖으로는 지나(支那)5) 정부에 대해서 제제(帝制)의 연기를 권고하였다. 또한 영-일 동맹의 신조에 기반을 두어 속히 독일에 선전포고 하였다. 오쿠마 내각은 결코 시위소찬의 무능한 정부는 아니었다. 그 용왕매진(勇往邁進)하며 세상의 훼예포폄(毁譽褒貶)에 굴탁(屈託)하지 않고 총선거에 의해 다수의 지지 여당을 얻었다고 하나 그 때문에 급격히 상하의 여망(輿望)을 잃은 것은 첫번쨰 실책이다. 감채기금(減債基金)을 삭감하고 재정을 위태롭게 한 것은 두번째 실정(失政)이다. 근본적 대 지나 정책을 확립하지 않고 어떨 때는 남쪽과 어울리고 어떨 때는 북쪽을 편들어 우왕좌왕하며 소위 두 마리 토끼를 쫓은 실태를 연출한 것이 세번째 유정(謬政)이다. 아직 칭다오[靑島]를 함락시키기 않고 미리 환부(還附)를 성명하여 스스로를 헤아릴 수 없는 궁지에 빠뜨린 것이 네번째 과오이다. 칭다오 전역(戰役)과 즉위 대례의 논공에 즈음하여 상의 남발이 왕성하게 이루어져 스스로를 받드는 것이 심히 두터움이 다섯번째 누태(陋態)이다. 이상의 실정이 중첩되어 천하의 성망(聲望)을 실추하고 세인(世人)들로 하여금 점점 오쿠마 내각의 조치에 불만을 품기에 이르렀다. 현명한 후작은 원래부터 이를 알아채지 못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아직 크게 실패를 폭로하지 않았을 때에 고답용퇴(高踏勇退)하여 원만한 사직(辭職)의 명예를 온전히 하려고 하였다. 그 후계자를 당세에 물색하여 데라우치 백작을 찾았다. 생각건대 백작은 정직 일도의 군인으로 권모술수를 부리지 않고 10년간 육군대신의 지위에 있었으면서도 조금도 정실(情實)에 얽매이지 않았다. 7년간 곤외(閫外)의 중임6)에 있으면서도 능히 반도의 새로 귀부한 인민들을 위무하였다. 가장 진지한 군자인(君子人)으로서 기대를 원로들 사이에 받고 있고 특히 육군 군인들에게 중진으로 여겨졌다. 또한 정당 정파 사이에서도 일반에게 호의적으로 환영받고 있기도 했다. 이에 백작을 조선으로부터 불러 후계자로 가정하려 하니 후작도 또한 사람을 보는 눈이 밝다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당초 후작과 백작과의 회견은 서로 마음을 터놓고 간담을 드러내었다. 그 사이에 어떤 격의도 없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후 그 교섭이 점차 진척되면서 백작은 후작의 여당과 제휴하라는 사약(私約)을 피하였다. 후작도 또한 칭칭 얽힌 여당의 정실에 좌우되어 원만한 사직을 주저하였다. 여러 차례 교섭을 거듭할 때마다 더욱 용납할 수 없는 골을 형성하였다. 당시에 있어서 교섭의 진상은 오직 두 사람만이 능히 알고 나머지 사람들에 이르러서는 본디 그것을 확실히 알 수는 없다.
오쿠마 후작과 데라우치 백작과의 교섭은 7월 6일 데라우치 백작이 동상(東上)7)하여 오쿠마 후작을 수상 관저로 방문한 것으로 시작된다. 후작은 먼저 총리사직의 속뜻을 비치고 백작이 후계자여야 함을 종용하였다. 또한 말하기를 현 내각의 여당과 제휴하여 가토 다카아키[加藤高明] 자작과 연립내각을 조직하는 방법으로 (내각을 구성하라) 하였다. 후작에게 있어서는 실로 절호의 순서일 것이나, 국가 경영의 대책상으로 논하자면 전 내각의 내외 정무의 과오를 계승하여 그것을 미봉하고 호도하는 일은 진심이 있는 정치가가 참을 수 없는 바이다. 하물며 근각엄정(謹慤嚴正)하고 가장 충군애국의 염려로 넘치는 데라우치 백작에게 있어서임에랴. 백작은 당시 몸에 곤외의 중임을 지고 있어 근역(槿域)의 통치에서 공적이 아직 완전하지 않고, 한 뜻으로 삼가 힘쓰며 그 허물이 없게 할 것을 두려워하니, 무슨 여유가 있어 찰찰(察察)한 몸을 기꺼이 더러움에 던지겠는가. 이로써 백작은 깊이 후작의 호의에 감사함과 동시에 자기의 의견을 피력하여 말하였다. 지금 제국은 세계 무비(無比)의 대전에 참가하여 종국의 승리를 차리하려고 한다. 안의 분쟁을 일삼아 바깥의 모멸을 잊을 때가 아니다. 해야 한다면 국론을 통일하여 관민이 함께 협동 진력하여 시국에 대처해야 한다. 만약 한 당을 편들어서 다른 당을 적대시하고 스스로 구하여 정쟁을 일으키는 것 같은 일이 있다면 지존에 대해 받듦에 실로 우려가 많다. 생각건대 내각 대신들의 임면은 폐하의 대권에 속하지 신하들이 함부로 사사로의 의논할 것이 아니다. 고로 대명(大命)8)이 아직 내려오지 않았는데 앞서서 전도(前途)의 시정(施政)을 사사로이 논의하는 일은 피해야 한다. 그러면 각하9)의 생각하심에 대해서는 심사숙고한 다음 일정한 답변을 드리겠지만, 각하께서도 또한 고려하시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첫번째 회견은 서로 요령을 얻지 못하였다.
─ 黑田甲子郞, 『元帥寺內伯爵傳』, 元帥寺內伯爵傳記編纂所, 1920, pp.812-815.
오쿠마는 데라우치에게 총리직을 제안한 대신, 데라우치가 여당인 동지회(同志會)의 가토 다카아키와 연합하여 연립내각을 구성하라는 조건을 걸었다. 그리고 이를 거절한 데라우치. 과연 오쿠마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그리고 차기 총리직은 누구에게 돌아갈 것인가?
다음 편에 계속
耿君 編
== 편역자 주석 ==
1) 야마모토 곤노효에[山本權兵衛] 총리가 1913년에 조직한 내각.
2) 1914년 1월에 일어난 사건으로, 일본 해군이 다년간 독일의 지멘스사로부터 함정과 기기를 구입하면서, 관계자들이 그 대리점인 미쓰이 물산으로부터 거액의 뇌물을 받았던 사실이 발각된 뇌물 스캔들. 이 사건으로 인해 야마모토 내각은 1914년 3월 총사퇴했다.
3) 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를 가리킴.
4) 원로 측에서 제시한 2개 사단 증설의 문제를 가리킴.
5) 중국을 가리킴. 이후 원문을 따라 지나로 표기함.
6) 조선 총독으로 재임한 것을 가리킴.
7) 수도인 도쿄로 상경함.
8) 내각을 조직하라는 천황으로부터의 조칙을 가리킴.
9) 오쿠마 총리를 가리킴.
# by | 2009/06/30 13:47 | 아시아에서 길을 잃다 | 트랙백 | 핑백(2) | 덧글(8)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 지난 편에 이어서데라우치에게 총리직 제안을 했다가 협상에 실패한 오쿠마는 이번에는 동지회의 가토 다카아키를 총리 수반으로 하는 새로운 내각 구성을 도모했다. 당시 동지회는 중의원에서 최다 ... more
... bsp; 5) 대동국의 남자 6) 흰 무지개, 해를 뚫다7) 내가 조선의 국모를 죽였다 &n ... more
ps - 큰따음표가 '… 고려하시기를 바랍니다."' 쪽에 하나밖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