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의 바람 02 - 후삼년 전쟁과 오슈 후지와라 가문

지난 편에 이어서

1062년에 끝난 전구년 전쟁으로 오빠 아베노 사다토[安倍貞任]와 남편 후지와라노 쓰네키요[藤原經淸]를 잃은 여인 유카이치노마에[有加一之末陪]는 가문의 원수 집안의 아들인 기요하라노 다케사다[淸原武貞]와 재혼하였다. 그녀에게는 쓰네키요와의 사이에서 낳은 일곱살짜리 아들이 있었는데, 이 아들은 다행히 목숨을 건지고 기요하라 가문의 일원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이름을 기요히라[淸衡]라 하였다.

다케사다는 유카이치노마에와 결혼하기 전에 낳은 아들 사네히라[實衡]가 있었고, 둘째로 맞이한 기요히라, 그리고 유카이치노마에와의 사이에서 낳은 이에히라[家衡], 이렇게 세 명의 아들이 있었다. 즉, 기요히라와 이에히라는 어머니가 같은 형제였고, 사네히라와는 배가 다른 형제였다. 이런 복잡한 형제관계가, 결국 다케사다의 사후, 후계자 갈등으로 이어지게 되는데...

정토의 바람  02
- 후삼년 전쟁과 오슈 후지와라 가문

耿君이 삼가 지음


아베 가문을 멸망시키고 미나모토 가문마저 배제한 기요하라 가문은, 전구년 전쟁의 전공으로 진수부장군에 임명되었으며, 데와노쿠니와 무쓰노쿠니 양쪽 모두를 장악하는 등, 명실공히 에미시의 대수장으로 자리매김하였다. 1083년, 그런 기요하라 가문을 거느리고 있던 당시의 당주는 다케사다의 맏아들 사네히라였다. 하지만 사네히라에게는 자식이 없어 후계자 문제가 대두될 우려가 있었다. 이에 사네히라는 헤이시[平氏] 출신인 가이도노 나리히라[海道成衡]를 양자로 맞이하여 후계자로 삼았다. 그리고 나리히라의 아내로서, 미나모토노 요리요시[源賴義]와 다케 곤노카미 무네모토[多氣權守宗基]의 딸 사이에서 태어난 딸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기요하라 일족의 장로들은 사네히라의 후계자 선정과 며느리 간택에 불만을 품었다. 선정 과정이 사네히라의 독단으로 이루어졌고, 장로들은 배제한 채 겐지[源氏], 헤이시 등 무사 가문과의 연줄을 강화하겠다는 의도가 있는 것으로 의심되었기 때문이리라. 특히 사네히라의 할아버지인 다케노리[武則]의 사위로 거물급 장로였던 기미코노 히데타케[吉彦秀武]가 사네히라에 대해 강력히 반발하고 나섰다. 결국 히데타케는 군사를 일으켜 반란에 나섰고, 이때 기요히라와 이에히라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다. 이것이 바로 후삼년 전쟁[後三年の役]의 시작이었다.

이리하여 사네히라 vs 기요히라+이에히라의 대립 구도가 형성되어 분쟁으로 치닫게 되었다. 이때 무쓰노카미로 부임하게 된 것이, 바로 전구년 전쟁에서 무공을 뽐냈던, 미나모토노 요리요시의 아들 요시이에[義家]인데, 요시이에는 사네히라의 편을 들면서 군사를 파견하였고, 분쟁은 더욱 격화되었다.

그 순간, 느닷없이 사네히라가 사망하였다. 사네히라의 죽음에 대해서는 의혹이 존재하지만, 어쨌든 대결 구도의 한 축이 소멸하면서 사태는 일단 진정 국면에 접어들었다. 요시이에는 조정을 통해 기요히라와 이에히라 두 형제가 사이좋게 오쿠로쿠군[奧六郡]을 각각 3군 씩 나누어 다스리도록 판결했다. 그런데 이때 요시이에는 기요히라 쪽에 이사와, 에사시 같은 남쪽의 3군을 주었다. 이 지역은 다른 지역에 비해 훨씬 풍요로운 지역이었고, 옛 아베 가문과 기요하라 가문의 주요 거점이 위치한 곳이었기 때문에, 그 중요도가 매우 컸다. 왜 이에히라보다 기요히라에게 더 좋은 땅을 주었는지 자세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혹시 기요히라의 친아버지 쓰네키요의 일을 알고 있는 요시이에가 기요히라를 더 챙겨준 것은 아니었을까.

하지만 이것이 기요히라에게는 반대로 불행을 가져오게 되었다. 형에게 내려진 처우가 훨씬 더 좋다는 것을 깨달은 동생 이에히라는 불만을 참지 못하고, 결국 형 기요히라의 관(館)을 습격하여 기요히라의 처자 권속들을 모조리 살해하였다. 생지옥에서 가까스로 살아나온 기요히라는 요시이에에게로 도망가 도움을 요청하였고, 요시이에는 병력을 보태어 이에히라를 공격했다. 궁지에 몰린 이에히라 세력은 데와노쿠니의 누마 성책[沼柵]에서 농성하며 기요히라·요시이에 군에 맞서 싸워 이를 격파했다. 이 소식을 들은 그의 백부 다케히라[武衡]가 그를 지원하면서, 기요하라 가문의 주류 세력이 이에히라 편이 되었다. 마침내 전쟁은 기요히라+요시이에 vs 이에히라+기요하라 주류의 구도로 바뀌어 더욱 불길이 거세어졌다.

이에히라는 다케히라의 조언에 따라 누마 성책에서 나와, 난공불락의 요새라는 가나자와 성책[金澤柵]으로 옮겨갔다. 기요히라 세력으로서는 어려운 싸움이 되어 가고 있는 추세였다. 그런데 이때, 기요히라 편으로 들어와 있던, 전쟁의 단초를 만든 인물 기미코노 히데타케가 묘안을 제시하였다. 그것은 바로 군량 공격[兵糧攻め]이었다. 가나자와 성책은 난공불락의 요새이기는 하나, 포위당한 상태에서 외부 창고를 잃고 보급로가 차단될 경우 군량을 얻지 못하게 되므로 함락이 손쉬워지는 것이다. 이것이 일본 최초의 군량 공격 전술이었다고도 한다. 히데타케의 방식을 취한 기요히라와 요시이에는 결국 가나자와 성책을 함락시켰고, 이에히라는 잡병으로 변장하여 도망치다가 붙잡혀 목숨을 잃었다. 공교롭게도 전쟁을 시작한 기미코노 히데타케가 전쟁을 종결짓는 사람이 되었다. 때는 1087년, 이에히라의 죽음으로 기요하라 가문의 주류는 몰락했고 후삼년 전쟁은 막을 내린다.

요시이에는 전쟁이 끝난 뒤, 이 전쟁을 조정에 반역한 기요하라 가문에 대한 응징으로 보고하고 이에 대한 은상을 내려줄 것을 조정에 요청했다. 하지만 조정에서는 이를 기요하라 가문의 내분으로 간주하고, 요시이에가 이에 멋대로 개입한 것이라 하여, 어떤 은상도 내려주지 않았다. 결국 요시이에는 사유 재산을 처분하여 무사들에게 은급을 주어야 했다고 한다. 반면 기요히라는 유일한 기요하라 가문을 대표하는 유일한 인물로서 생존하여, 사네히라의 뒤를 잇게 되었다. 기요하라 가문의 세력권을 접수한 기요히라는 비로소 온세상에 외쳤다.

"내 아버지는 오슈 합전 때 돌아가신 후지와라 와타리노 곤노타이후 쓰네키요이시며, 나의 본래 성씨는 후지와라이다! 이제부터 나는 기요하라노 기요히라가 아닌, 후지와라노 기요히라로 돌아간다!"

25년이 넘는 인고의 세월을 견디고, 그는 이렇게 화려한 복수와 부흥의 시간을 맞이하게 되었다.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괜히 내가 다 가슴이 벅차다. 이렇게 탄생한 후지와라 가문을 오늘날 역사용어로는 '오슈 후지와라 가문[奧州藤原氏]' 또는 '히라이즈미 후지와라 가문[平泉藤原氏]'이라고 부른다.


외가의 몰락과 아버지의 참혹한 죽음.
어머니와 함께 한, 원수의 집안에서의 고통스러운 삶.
전구년 전쟁과 후삼년 전쟁 내내 지켜보아야 했던 살육의 현장들.
그 사이에서 무참하게 쓰러져간 병사들과 학살된 양민들.
죽기 싫으면 죽여야 하는, 형제 간에도 예외가 없는 비정한 정치의 세계.

소년 시절부터 청년기를 거쳐 30대가 될 때까지, 청춘 시절을 그런 피바람 속에서 보내야 했던 기요히라에게는 평화를 갈구하는 마음이 너무도 강했다. 마침 당시 조정을 중심으로 유행하던 사상은 극락정토를 꿈꾸는 정토 사상이었고, 기요히라는 이를 절실한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옛 아베 가문과 기요하라 가문이 쌓아놓은 토대를 기반으로 번영을 이룩한 기요히라는, 후지와라 가문의 새로운 근거지로 히라이즈미를 택하였고, 그 땅에 정토 사상이 깃든 사찰들을 건축하였다. 무쓰노쿠니에서 발견되어, 에미시와 조정을 싸우게 만들었던 그 황금은, 이제 히라이즈미의 금당과 불상들을 꾸미는 데에 쓰이게 되었다. 금빛으로 빛나는 극락 정토가 히라이즈미에 펼쳐지고 있었다.

耿君 識

다음 편에 계속

by 耿君 | 2009/01/27 23:12 | 일본에 가다 | 트랙백 | 핑백(3) | 덧글(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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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지와라노 기요히라는 바로 지난 <모리오카로 오세요> '전구년 전쟁과 아베타테' 편에서 소개되었던, 전구년 전쟁에서 죽은 후지와라노 쓰네키요의 어린 아들이다.耿君 識다음 편에 계속 ... more

Linked at 耿君春秋 : 정토의 바람 03.. at 2009/01/28 15:53

... 지난 편에 이어서이치노세키 역에서 출발하여 몇 분 지난 뒤에, 작은 시골역인 히라이즈미 역에 도착했다. 이제 오슈 후지와라 가문의 숨결이 묻어있는 히라이즈미가 눈앞에 펼쳐진다. 들뜬 마음 ... more

Linked at 耿君春秋 : '일본에 가다' .. at 2009/04/11 17:58

... ㅎ 오슈 후지와라 가문이라든지 히라이즈미라든지 하는 것은 국내에 거의 잘 소개되지 않았기 때문에, 나름대로 야심차게 준비한 포스팅이었습니다.01 히라이즈미 가는 길02 후삼년 전쟁과 오슈 후지와라 가문03 이것은 정토의 바람?04 간지자이오인 터05 모쓰지 이야기 (1)06 모쓰지 이야기 (2)07 모쓰지 이야기 (3)08 스즈카케노 미치09 요시쓰네 ... more

Commented by 악희惡戱 at 2009/01/28 00:05
이 집안도 비범한 내력을 보유하고 있었군요;;;
그나저나 고대 일본의 전투란 건 정말 궁금하군요. 바다 건너 땅에서는 당연하게 행해지던 병참 차단 공격이 묘안이라니... 단노우라 전투 때부터 뱃사공을 공격하기 시작했다는 얘기도 그렇고 말이죠^^
Commented by 耿君 at 2009/01/28 00:35
솔직히 저로서도 저게 일본 최초의 병량 공격이란 말이 잘 믿기지는 않는군요.
그만큼 이전에는 우직하게 몸빵으로 싸웠다는 뜻일까요...
확실히 무사 집단의 등장으로 전투 기술이 급발전한 듯도 싶네요.
Commented by 진성당거사 at 2009/01/28 17:13
이 역시 앞의 전구년전쟁 포스팅과 같이 아주 잘 읽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참....저 역시도 고대 ~ 중세(천학인 제 생각으로는 대략 오다 노부나가 등장 전까지) 일본의 전투를 보고 있으면 뭔가 참....묘한 생각이 듭니다.;;
Commented by 耿君 at 2009/01/29 01:14
잘 읽으셨다니 잘되었네요~~
전투에 대해서는 좀더 살펴보아야겠습니다. 평소에 신경쓰지 않던 부분인데 이렇게 주목하게 되는군요 ㅎㅎㅎㅎ
Commented by leopord at 2009/01/29 11:20
기요히라 역시 일본의 전형적인 귀족이지만서도, 묘하게 감격적이군요. 그런데 역사개괄로 보여지는 기요히라의 모습에서 전투적인 지도자의 모습은 없는 듯 합니다.ㅎ
Commented by 耿君 at 2009/01/29 12:06
군사 지도자로서의 면모는 그렇게 드러나있지는 않지요. 기요히라는 아버지가 종5위의 후지와라 가문 출신이지만, 어머니가 에미시의 수장의 딸이고, 그 세력기반도 에미시에 해당해서인지, 스스로를 에미시라고 인식했던 것 같습니다.
Commented by rumic71 at 2009/01/29 12:15
이제야 갚으리 그날의 원수를 쫓기는 적의 무리 쫓고 또 쫓아~
Commented by 耿君 at 2009/01/29 14:46
헐 ㅋㅋ 타이틀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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