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밥의 재구성 03

이능화의 <조선신사지> 제21장 '참고: 만몽 여러 옛 나라의 풍속' 제1절 '숙신' 편에 나온 글을 다시 옮겨본다.

숙신(肅愼)은 극동(極東)에서 가장 오래된 나라이다. 그 나라 이름이 중국 역사에 실려 있는 것도 또한 가장 먼저이다. …(중략)… 대개 숙신은 조선이라는 음(音)과 가까워, 곧 조선이 전변(轉變)한 것인지도 알 수 없다. 또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를 살펴볼 떄, 만주와 조선이 숙신의 옛땅에서 일어났으므로, 그 속한 땅을 '주신(珠申), Chusin'이라 하는데 이것은 '조선(朝鮮, Chosen)'과 글자의 음이 별 차이가 없다. 비록 그러하나 《산해경(山海經)》 안에는 조선과 숙신이 두 나라로서 각각 다르다 하니, 곧 "동해 안쪽 북해(北海)의 구석에 나라가 있는데 이름이 조선이다. 조선은 열양(列陽) 동쪽, 바다 북쪽 산(山)의 남쪽에 있으며, 열양은 연(燕)에 속한다. 대황(大荒)의 가운데 불함(不咸)이라는 산이 있고, 숙신(肅愼)이라는 나라가 있다" 한 것이 이것이다. 이것으로 볼 때 두 나라의 지리적 구분이 심한 차이가 없으니, 즉 숙신국과 불함산의 위치가 모두 어찌 동해 안쪽, 북해의 구석, 조선의 지역이 아닌가? 그러므로 숙신은 곧 조선의 전변이 아닌지, 혹은 조선의 일개 부락인지도 알 수 없다. 대개 숙신의 풍속은 조선 단군 계통과 유사한 것이 있으니, 즉 《진서(晉書)》에 "숙신은 그 나라 동북쪽에 있는 산에 철(鐵)나는데 캘 때에 반드시 먼저 신(神)에게 빈다" 한 것이 이것이다.[1]


떡밥의 재구성 03

耿君이 삼가 지음

이능화는 숙신에 대해 극동의 가장 오래된 나라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만주원류고』를 참고하여, 만주와 조선이 함께 숙신의 땅에서 일어났고, 조선과 주신의 음이 비슷하므로, 조선이나 숙신이나 비슷한 곳에 있는 나라였거나, 아니면 조선의 변한 말이 숙신이거나, 조선에 속한 지역이 숙신일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위 인용문의 다음 문장도 이어서 보자.

요즈음 베이징에 있는 신채호(申采浩)가 발표한 《전후 삼한고》에 "삼한은 곧 삼조선(三朝鮮)이니, 전후 삼한의 역사를 말하려면 반드시 먼저 조선의 의의(意義) 및 삼조선의 내력(來歷)을 밝혀 아는 것이 중요하니 《관자(管子)》에 '8천 리의 발조선(發朝鮮)' '발조선의 문피(文皮)' 등의 말이 있고, 또 《사기》와 《대대례(大戴禮)》에 '발숙신(發肅愼)'의 이야기가 있으니, '발숙신'은 곧 '발조선'이고, 조선과 숙신이 본래 동일한 명사이며, 두 가지로 번역할 수 잇음을 명백히 알 수 있다" 하였다. 건륭제(乾隆帝)의 《만주원류고》에 "숙신의 본음(本音)이 주신(珠申)이니, 주신이라는 것은 관경(管境)이다" 하였다. 곧 조선의 음이 바로 주신이며, 그 뜻은 관경이 되는 것도 또한 명백하다.[2]

여기서 드디어 신채호의 주장이 등장한다. 신채호는 『전후 삼한고』에서 '발조선'과 '발숙신'이란 말이 중국 사서에 등장하므로 발조선=발숙신이며, 조선과 숙신이 동일한 말이라고 하였다. 이능화는 이 설을 수용하여 자신이 앞서 말한 조선≒숙신을 조선=숙신으로 확정짓고, 『만주원류고』를 인용해 아예 '조선=숙신=주신=관경'의 등식을 구체화하고 있다. 신채호의 논설에 대해서는 여기서 굳이 자세히 다루지는 않으나, '조선=숙신=주신'의 오류'발조선=발숙신 → 조선=숙신'의 그릇됨은 소하님의 블로그 포스팅을 참조하시길 바란다. 이 포스팅에서는 그보다도 악질식민빠님의 '신채호 파닥파닥설 + a' 포스팅과 관련된 이야기를 다루고자 한다.

이능화가 <조선신사지>를 낸 것은 앞서도 계속 언급하였지만 1929년이다. 그리고 신채호가 주신에 대해 언급한 『전후 삼한고』는 1924년에 나왔다. 이보다 앞서 최남선이 1918년에「계고차존」에서 '주신'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 부분을 살펴보도록 하자. 최남선은 「계고차존」의 '서론'에서 인류의 시작부터 조선의 등장에 이르는 줄거리를 서술하고 있는데, 그의 말에 따르면 조선인이 거주하던 지역이 과거에는 '자못 광대'해서 '송화강을 중심으로 하여 북으로 흑룡강, 흥안령을 지나고 남으로 황하 근방, 반도 부분을 포함한' 넓은 땅이었으며, 그 선구자들이 풍요한 산하에 안주하게 된 것이 적어도 5, 6천년 전의 일일 것이라 한다. 4500년 전 쯤에는 나라를 건설하고 통치체제를 세웠으므로 조선인이 원시적 거주민 이외에 최초로 와서 가주하고 최고(最古)의 문명을 이룩한 민족이라고 한다. 다만 그 자리잡은 집단이 하나의 집단이 아니고, 서로 각축 경쟁하고 또 지역적 특성에 따라 성질이 차이가 생기면서 각 부족과 명칭이 다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다음에 이 글이 나온다.

그러나 3천 년 전 당시까지는 '주신'이란 총명(總名) 아래 여러 다종의 성(姓)을 괄칭하니, 그 원래 뜻은 지금에 미상(未詳)하며, 한자로 옮김에 혹 숙신(肅愼), 숙신(肅眘), 직신(稷愼), 식신(息愼)으로 쓰고, 혹 수신(<僂+攵>侲), 숙연(肅然), 숙근(肅謹)으로 변하였으며 중간에는 혹 맥(貉)이란 이름 중에 통칭되니, 맥은 본디 요하 주변에 거주하던 '주신'인 일족의 명칭이로되 가장 한인(漢人)에 근접하므로, 한인이 혹 이로써 '주신'인을 통칭함이러라('주신'인 중에 점차로 강대한 여러 나라의 명칭이 현저한 후에는 '주신'의 이름이 다만 불함산 북쪽 원시적 부족의 일명이 될 뿐이어라)[3]

최남선은 '주신'이라는 명칭을 조선 이전의, 광대한 영역에 퍼져 살던 느슨한 다종적 집단의 명칭으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주신이나 숙신이 조선과 통한다는 이야기는 언급하지 않고 있지만, 1926년 4월 조선일보에 게재한 「아시조선(兒時朝鮮)」에는 조선국의 어원에 대해

조선은 '처(음)샌' ─ 곧 최초의 문명처란 뜻이니, 따로 '수신(肅愼)'이라 일컬음도 동일한 의미이며,[4]

라고 하여 숙신=조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과연 최남선이 '주신'이라는 명칭과 개념을 어디서 찾아낸 것인지, 아니면 무엇을 가지고 창안했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어쨌든 '주신'과 숙신 등에 대한 것은 최남선의 글에 먼저 보이며, 이후 신채호가 주신이 조선과 같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이능화도 최남선, 신채호 등에 의해 당시 널리 퍼져 있던 주신=숙신=조선의 논의를 가져와 자신의 글에 적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상 언급한 세 가지, '환국', '단군', '주신'에 관한 내용은 <조선신사지>의 일부 내용에 불과하다. <조선신사지>가 다루고 있는 시대 범위는 고조선부터 조선왕조에 이르며, 제21장 참고편에는 만몽의 여러 부족들의 풍속까지 소개되고 있다. 그외에도 여러가지 '떡밥'들이 <조선신사지>에 보이는데, 이것들이 '떡밥'이라 느껴지고 신기하게 여겨지는 것은 아마도 그 저자가 식민사학을 구축하는 친일적 행보를 보였다는 '이능화'였기 때문에 더 그런 것은 아닐까. 이번에 '이 글을 쓴 사람…' 포스팅과 '떡밥의 재구성' 포스팅을 준비하면서 파악한 내용들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1)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했으며 친일파로 낙인찍힌 이능화의 학문적 성과 속에는 의외로 '민족주의 사관'과 조선민족의 우수성을 이야기하는 부분이 많다. 일반적으로 이능화 하면 식민학자로서 다분히 민족 말살적이고 세련된 글을 썼을 것으로 추측되는 경향이 있었는데, 그렇지만도 않음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이능화는 자신의 저작 대부분을 한문으로 썼다.

(2) 이능화의 저술 속에 나타나는 '환국', '단군', '주신' 등 상고사 관련 화두들은 - 그 내용의 타당성 여부를 떠나 - 최남선, 신채호 등이 이미 1910년대부터 언급하기 시작하여 이미 1920년대에는 널리 많은 이들에게 알려진 것이었다. 이는 이능화가 이룩해온 학문적 성과들(예를 들면 <조선신사지>나 『조선도교사』, 『조선무속고』 등등) 이 대개 조선의 역사에 대한, 문헌 및 사료 취합을 통한 역사적 맥락의 정리에 있었음을 환기시켜준다. 그리고 - 이것은 짐작에 불과하기는 하나 - 이능화가 최남선과 조선사편수회에 함께 참여하는 등 교류가 있어서 그로부터 상고사에 관한 약간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3) 이능화는 이미 1922년부터 조선사편찬위원회에, 그리고 1925년부터는 조선사편수회에 위원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그런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이능화가 '단군'에 대한 이러한 입장과 견해를 표명하는 것은 결코 방해받지 않은 것 같다. (덧붙이자면, 사실 그가 조선사편수회에서 조선사 편찬에 참여했던 부분은 조선왕조 후기의 역사이다)

마지막으로 최남선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글을 마치려 한다. '환국', '단군', '주신'과 같은 이런 개념의 시작에 가까운 지점에 늘 최남선이 있었다는 것은 상당히 흥미가 유발되는 점이었다. 그리고 최남선이 「단군론」 등을 통해 시라토리, 이마니시 등과 같은 일본 학자들의 주장을 정리하고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는 것도 이번 포스팅 준비를 통해 알았다. 그런 사람이 조선사편수회에 들어갔다는 것은 당시 사람들에게도 상당히 충격적인 일이었던 모양이다. 연재하고 있던 글도 다 중단될 지경이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조선사편수회에 들어갔다고 해서 최남선이 단군에 대한 모든 것을 부정하거나 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시라토리와 비슷한 학문의 길을 걸어온 구로이타 가쓰미라든가 편수회에 참여하는 여러 학자들과 '단군'을 놓고 옥신각신하는 것이 조선사편수회 촉탁위원 최남선의 모습이었다.

다만, 최남선이 단군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고 해서, 이능화가 민족의 자긍심을 보여주는 내용의 글을 남겼다고 해서, 그들의 소위 '친일'의 행보가 말끔히 해소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불함문화론」 등에서 보이는 조선민족과 일본의 문화적 일치 운운 하는 말들은 종국에는 일선동조론으로 연결이 되며, <조선신사지> 속에서 조선, 일본과 만몽 여러 민족의 제천의식이 상통한다고 하는 서술 등은 그 주어를 '조선 민족'에서 '야마토 민족'으로 바꾸면 되는 것일 수 있다. 더 많은 공부를 필요로 함을 느낀다.

耿君 識


== 주석 ==
[1] 『조선신사지』, pp. 351-352.
[2] 주석 [1]과 같음
[3] 「계고차존」, p. 15.
[4] 최남선, 「아시조선」, 『육당 최남선 전집』 2권, 현암사, 1973, p. 157.

by 耿君 | 2008/09/20 15:56 | 춤추는 대修史선 | 트랙백 | 핑백(2) | 덧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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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없다는 식으로 논리를 전개하면서 표기에 의미가 없다는 견해를 보이게 되었다. 다음은 이 글을 쓴 사람은 누구일까요 02 G번 지문에 나오는 '주신'에 대해서 보도록 하자.- 다음 편에 계속== 주석 ==[1] 1629~1711. 조선 후기의 문신. 영의정에까지 올랐다. '동창이 밝았으니 노고지리 우지진다…'는 시조의 작자로 유명하다. 문집으로는 『약천집』이 ... more

Linked at 耿君春秋 : 시라토리 구라키치.. at 2009/01/12 18:23

... 러 블로거 분들이 소위 '쥬신'이라는 희대의 떡밥, 그리고 '숙신'을 다룬 포스팅들을 올리신 것을 본 적이 있다. 나 또한 그런 글들에 영향을 받아 떡밥의 재구성 포스팅에 최남선, 신채호의 '주신' 이야기를 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보다도 나의 '숙신'에 대한 관심을 끄는 것은 다른 쪽에 있었다. 『일본서기』에는 658년에 장군 아베노 ... more

Commented by 악질식민빠 at 2008/09/20 17:40
박광용 선생의 분류고 다른 입장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민족사학자와 친일계열의 단군 관련 논설의 구분은 단군을 민족신에서 보편신으로 확장할 것이냐의 여부로 어느 정도 구별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정확하게 이런 언급은 아니고, 그분의 글을 읽고 제가 받은 느낌은 이런 것이었습니다...정도랄까요.)

보편론으로 기울수록 일제의 대동아논리와 점차 가까워지면서, 결국 친일노선으로 기울게 된다...는 것이었는데, 예전에 http://hyunk02.egloos.com/2049713 이 포스팅을 보면서 상당히 보편주의적인 느낌이 들어서, 민족사학자로 분류되는 사람이 아닐거라고 생각해 이능화임을 알게 되었습지요.

결론 : 소 뒷걸음질 (...)
Commented by 耿君 at 2008/09/21 00:19
소 뒷걸음질로도 경제만 살리면 됩니다. (응?) 그래도 이능화임을 알게 되신 게 대단하신듯. 저보고 맞히라고 했으면 못 맞혔을 겁니다.
아 그리고 민족신과 보편신의 구분, 이거 좀 괜찮은 것 같습니다.
Commented by 한단인 at 2008/09/20 18:27
저번에 전화로 檀의 훈 박달=배달로 연결시키는게 일선동조론과 연결될 수 있다고 하신 부분(제 기억상으로는)도 언급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부분은 언급이 안됐네요.

악질식민빠님이 말씀하신대로 민족신에서 보편신으로 확장한다고 할 경우라면 檀이든 壇이든 큰 상관이 없어서 그런건가요? 전자의 경우라면 천조대신하고 연결될거라고 전화 도중에 생각이 들긴 했습니다만..
Commented by 耿君 at 2008/09/21 00:21
불함문화론 등에서 밝달=배달이 동아시아의 여러 단어들과 얽히고, 단군=tengri=天狗의 등식이 형성되는 식으로, 동아시아, 특히 한국과 일본 사이의 문화적 코드의 유사성이 언급됩니다. 이 점이 일선동조론으로 연결된다고 할 수 있겠지요?
Commented by 한단인 at 2008/09/21 01:30
아니.. 거기에 텐구도 엮인단 말입니까? ㅎㄷㄷ
Commented by 耿君 at 2008/09/21 09:24
그렇더군요.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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