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룡회 회원 명단 (해설)

본 포스팅은 흑룡회 회원 명단을 정리하여 포스팅하면서 파악하게 된 회원 구성의 특징과 의문점, 그리고 정리 과정에서의 일들을 적은 글입니다.

1901년부터 1910년까지의 흑룡회 회원 명단은 아래 링크를 참조하세요.
찬조원 명단
정회원 명단 (1)
정회원 명단 (2)

1. 흑룡회 회원 명단에 관하여

이번 '흑룡회 회원 명단' 연작 포스팅은 흑룡회에 관하여 자료 검색을 하던 도중 한 박사학위 논문을 발견하면서 이루어졌습니다. 그 논문 말미에 '흑룡회 성립부터 일한병합 때까지의 흑룡회 회원' 명단이 실려 있는 것을 확인한 필자는 이 명단을 통해 흑룡회를 구성한 사람들은 주로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그 모임의 성격이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겠다는 생각에 명단을 가지고 각 회원들의 정보를 탐색해보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명단에는 한자 성명과 비고 사항만 적혀 있을 뿐이며, 또 그 비고사항이라는 것도 소략하거나 없는 것이 많아 인물 정보를 자세히 알려주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한자 성명을 어떻게 읽는지, 그들의 생몰년도, 업종, 직책, 주요한 업적 등은 무엇이 있는지를 조사해서 추가하고 이를 다시 정리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그 작업은 매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인물의 인명 읽기와 정보 검색을 위해 야후 저팬을 활용하였는데, 몇몇 유명한 인물을 제외하고는 대개 원하는 검색 결과를 얻어내지 못하였습니다. 대다수의 인물들은 아예 검색결과가 나오지조차 않았습니다. 그런 인물들은 어쩔 수 없이 비고 사항을 채우지 못하고, 대신 성과 이름자를 분리해서 그 읽는 방법을 유추해보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찬조원 명단을 정리하는 데에는 2, 3일 정도의 시간이 소요되었고, 정회원 명단은 8월 3일부터 작성하기 시작해서 19일에야 완성을 보았습니다. 정리를 하면서 이걸 엑셀로 작업하면 어떨까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만 그때는 이미 작업을 중간 정도 한 상태라 눈물을 머금고 그 생각을 접었습니다. 혹 강호에 용자 한 분이 계시어 이를 엑셀 시트로 만들어주신다면 참 좋겠습니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 흑룡회 명단은 흑룡회가 창립된 1901년부터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된 1910년까지의 회원들만을 수록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흑룡회는 1946년에 GHQ에 의해 정식으로 해체되기까지 여전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1910년 이후에 가입한 흑룡회 회원들은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궁금해집니다. 그리고 1901년에서 1910년 사이에 회원으로 이름이 등재되어 있는 사람들도 언제 가입했는지, 그리고 탈퇴를 하였는지 등의 정보는 이 명단을 통해 알 수 없습니다. 제 개인적 역량으로는 그것까지 조사하는 것은 어려웠습니다. 명단을 보시는 여러분들은 이 점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2. 흑룡회와 현양사

그러면 이제 흑룡회 명단으로 눈을 돌려보도록 하겠습니다. 찬조원 명단에 대해서는 포스팅 말미에 약간의 코멘트를 이미 한 바 있으므로 이 포스팅에서는 정회원 명단을 위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자 합니다.

명단에 각 인물들의 출신지를 일일이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조사해본 바에 따르면 흑룡회의 회원 다수가 규슈 북부 출신입니다. 흑룡회의 핵심 인물인 우치다 료헤이도 후쿠오카 출신이고, 제 포스팅을 통해 다룬 바 있던 곤도 세이쿄도 후쿠오카 인근 구루메 번 출신입니다. 그 외에도 규슈 일보 기자라든가 규슈 지역에서 사업을 하는 사람들이 비교적 많이 포진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된 데에는 흑룡회가 우치다의 주변 사람들을 중심으로 한 단체라는 점도 작용했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흑룡회가 현양사의 해외공작 본부에 해당하는 단체로서 등장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특히 흑룡회의 찬조원 멤버이자 고문으로 현양사의 창립멤버 도야마 미쓰루가 얼굴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렇듯 흑룡회의 성립에 있어 불가결의 관계에 있는 현양사는 바로 옛 후쿠오카 번의 번사들을 중심으로 한 정치단체였습니다. 따라서 흑룡회 회원들 중에는 필연적으로 규슈 북부, 특히 후쿠오카 지역 출신자들이 많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흑룡회의 회원 대부분이 역시나 현양사에 몸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해볼 수 있는데, 머찐만두님의 제보로 알게 된 현양사원 명부와 대조해서 확인해보니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현양사의 멤버들 중 흑룡회에도 가입하고 있는 사람들은 여럿 있습니다만, 그 수가 생각보다 많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주목할 점은 현양사와 흑룡회 양쪽에 모두 몸을 담고 있는 사람들의 경우, 현양사원으로서는 비교적 나이가 젊은 1860년대 생이 많았다는 점입니다. 즉, 흑룡회는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현양사의 해외공작 본부였고, 또 젊은 현양사원들이 참여하는 모임이었던 것입니다.

3. 유도가들

흑룡회 회원들 중에는 유도를 하는 사람들이 비교적 많이 보입니다. 아오키 야스타로나 지바 헤이조, 혼다 아리야 등을 그 예로 들 수 있는데, 이런 회원들은 명도관에 소속되어 있는 경우가 많은데, 명도관(明道館)이란 현양사의 부속 도장으로, 후쿠오카 번사였던 후지타 노리사다를 유조로 해서 후쿠오카 번에서 전래되는 무술인 자강천진류(自剛天眞流)를 전승하는 곳이었습니다. 도야마 미쓰루도 이 명도관의 무술을 전승하는 사람 중 한 명이었습니다. 자강진천류는 각종 물건을 무기로 활용하는 무술로, 오늘날에는 유술이 주로 전해진다고 합니다. 1882년 가노 지고로가 강도관(講道館)에서 '유도'를 창시하였을 때, 자강천진류는 강도관 유도에 저항하지 않았고, 우치다 료헤이도 천진관이라는 도장을 세워 자강천진류와 강도관의 유술도 함께 지도했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흑룡회에는 강도관 출신 인사들 또한 들어있습니다.

과거 번의 사무라이 출신이었던 이들은 대개 집안과 번에서 무술을 익히며 자랐고, 각 번에는 무술 훈련과 심신 단련을 지도하는 유술 사범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메이지 시대를 맞아 사무라이의 지위를 잃고, 유술 사범들은 번의 사범의 자리도 잃게 되면서 배회하게 됩니다. 문명개화의 바람 속에서도 이들은 무술을 갈고 닦으며 전수를 계속해나갔고, 마침내 기회는 왔습니다. 민간에서 유흥 차원으로 유술이 인기를 끌고, 학교교육에서 과외 수업의 일환으로 유술이 채택되며, 강도관의 유도가 유술의 주류 자리를 차지하는 상황이 오자, 이들은 유도가로서 도장을 차리고, 유도 사범으로 교육계에 진출하게 됩니다.

4. 사족(士族), 자유민권운동, 중의원 의원

이렇듯 현양사, 흑룡회를 구성하는 많은 회원들은 대개 번의 사무라이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소위 '사족(士族)'으로 불리던 사람들이었지요. 이들은 징병제와 폐도령, 국민개성(國民皆姓) 등의 조치로 인하여 기존의 특권을 상실하였고, 질록처분으로 받은 자금으로 메이지 시대를 살아나가야 했습니다. 이들 중 대다수는 교원이나 공무원, 군인 등이 되었고, 사업을 하는 사람도 생겨났으며, 홋카이도 개척 붐을 맞아 둔전병으로 진출한 사족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족들은 사회 적응에 성공적이지 못하였고, 결국 이들 사족들의 불만은 세이난 전쟁으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이들 불평사족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정치운동이 바로 '자유민권운동'이었습니다.

초기 자유민권운동은 자신들을 이렇게 만든 메이지 번벌 정치에 저항하는 움직임이었다고 하는 편이 좋을 듯도 합니다. 이들은 정치 참여를 위해 '민선의원설립건백서'를 제출하여 의회 개설을 촉구하였습니다. 또 지조 감면, 언론과 집회의 자유 등을 주장하며 반정부적인 운동을 지속했습니다. 이러한 자유민권운동의 움직임 속에서 1881년 자유당이 탄생하였으니, 흑룡회 회원들 중 '자유당 좌파'라는 호칭을 달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여기 속해 있던 사람들입니다. 이후로도 준정당 집단이 속속 출현하여 의회의 설립을 강력히 주장했고, 움직임이 격해지면서 폭동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1886년 대동단결운동으로 자유민권운동의 단합이 이루어진 후 나카에 조민, 도쿠토미 소호 등의 사상가들이 합세하여 자유민권운동은 꽃을 피우게 됩니다. 결국 1890년 제국의회가 설립되면서 이들은 정치 참여의 길에 나서게 되었고, 청장년 시절 자유민권운동에 몸담았던 흑룡회의 멤버들 다수 또한 나중에 국민들의 신망을 배경으로 중의원 선거에 출마하였고, 또 당선되는 사람이 나왔습니다.

5. 기자들

자유민권운동의 주장 중 하나가 언론의 자유였다는 것은 앞서 이야기했습니다. 이들은 언론사를 설립하고 언론매체를 통해 자신들의 자유민권사상을 유포하였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족 출신 인물들이 이런 언론사에 입사하여 기자와 문필가로서 활동했습니다. 흑룡회 회원들 중 기자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유독 많은 이유는 바로 여기에 기인합니다. 규슈 신보나 시사신보, 일본신문, 일일신보 등의 여러 신문사에 입사한 이들은 번벌 정치에 휘둘리는 조국을 올바른 번영의 길로 이끌겠다는 나름의 애국심에 가득찬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아, 二六新聞/二六新報라는 신문은 흑룡회의 부속 신문입니다.

이처럼 기자라는 직업 또한 사족과 자유민권운동의 맥락 속에서 살펴보자면 흑룡회의 멤버로 들어가있는 것이 이상하지는 않습니다. 여기에 한 가지 더 추가할 점이 있다면, 기자가 해외활동을 하는 데에 있어서 좋은 직업으로 작용했다는 점입니다. 흑룡회 회원 중에 福陵신문 특파원 혹은 기자의 직함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복릉(福陵)이란 지금의 중국 랴오닝 성 선양(瀋陽) 시 동부 지역으로 누르하치의 능묘가 있는 지역을 말합니다. 이들은 중국으로 건너가 기자로 활동하면서 해외 사정을 접하고 또 손문, 송교인 등과 같은 중국의 혁명 인사들과 교류하면서 그들을 지원했습니다.

6. 해외 공작

그러고보면 흑룡회에는 꽤 많은 해외 전문가들이 있습니다. 노청어학교에서 활동하며 러시아어나 중국어에 능통했던 사람들이 상당수 있었고, 한반도, 만주, 몽골, 중원, 러시아 등 동아시아 각지의 사정을 자세히 알고 또 그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사람들이 역시 흑룡회 회원으로 이름을 올리고 있습니다. 동학농민운동에 개입 시도를 하고 을미사변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던 천우협 출신 멤버들도 다수 흑룡회에 몸을 담고 있으며, 러일전쟁 때 아예 만주, 연해주 등지로 건너가 첩보활동을 하던 사람들도 있습니다. 오키 데이스케와 요코카와 쇼조는 첩보활동 중 붙잡혀 러시아 군에 처형되기도 했습니다.

흑룡회라는 명칭은 흑룡강에서 왔습니다. 우치다 료헤이가 시베리아 횡단을 할 때 봄이 찾아온 흑룡강 강변에 흐드러지게 꽃이 피어있는 평화롭고 아름다운 광경을 보고, 동아시아의 이상은 바로 이 광경에 있다고 깨달았다고 합니다. 현양사가 현해탄으로 이름을 삼았다면, 흑룡회는 흑룡강까지 진출하여 러시아를 몰아내고 동아시아의 평화를 찾자는 취지에서 흑룡강에서 이름을 딴 것입니다. 따라서 흑룡회는 중국의 혁명 세력 지원을 통한 청 제국의 붕괴, 러시아를 끌어들이려는 명성황후의 제거, 러일전쟁 수행을 통한 러시아의 아시아 장악 음모 분쇄, 일한합방과 만주 진출, 만몽 독립운동 지원을 통한 서양 세력 격퇴로써 '동아시아의 평화'를 찾는 거대한 사업을 꾀했던 것입니다. 

7. 구루시마 쓰네키는 좀비?

이상으로 흑룡회 회원 구성의 특징을 살펴보았고, 그 점들을 통해 흑룡회라는 모임 자체의 성격을 한 번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명단을 정리하던 중 이상했던 점 한 가지를 지적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바로 흑룡회 회원 명단에 들어있는 구루시마 쓰네키(來島恒喜)의 이름에 관한 것입니다.

1889년, 당시 외무대신이던 오쿠마 시게노부는 자신이 내놓은 외국과의 불평등조약 개정안이 지나치게 타협적이라는 국민들의 반발에 대해 의견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현양사 회원이었던 구루시마는 이에 오쿠마를 응징하고자 그가 타고 있던 마차에 폭탄을 투척했지요. 폭탄은 그의 다리에서 작렬하여 결국 오쿠마는 오른쪽 다리를 잃게 되었고, 구루시마는 그 자리에서 칼로 목을 찔러 사망하였습니다. 고로 구루시마는 1889년에 사망하였습니다. 그런데 흑룡회 회원 명단에 보면 구루시마 쓰네키의 이름이 등재되어 있군요. 흑룡회의 성립연도는 1901년. 1889년에 죽은 사람이 1901년에 생겨난 모임에 회원 가입을 한다?

이 상황을 여러가지로 해석해 볼 수 있습니다.

1) 동명이인이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많이 희박해보인다.)
2) 명단 작성자(논문 저자)의 실수다, 혹은 자료의 실수다.
3) 우치다 료헤이 혹은 흑룡회 관계자가 날조했다. 혹은 의도적으로 이름을 넣었다.
4) 구루시마는 살아있다!! (응?)

뭐랄까 이렇게 보았을 때는 구루시마가 흑룡회의 회원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지만, 일단 이 명단에서는 그 이름을 빼지 않고, 여러분들의 판단에 맡기겠습니다.

8. 조선인, 중국인

이번에는 이상한 점은 아니고 특이했던 점 하나를 이야기하려 합니다. 바로 명단 중에 보이는 조선인과 중국인으로 추정되는 인명에 대한 것인데요. 명단 속에는 안상호, 윤치오, 신순성, 박진하, 민기호 등의 조선인 인명이 보입니다. 정가견은 한자로 보았을 때 중국인인 것 같습니다. 이들에 대한 자세한 인물 정보는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신순성의 경우 와세다 동창회 명부에 이름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재일 조선 유학생 출신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윤치오라든가 민기호 같은 이름은 비교적 잘나가던 집안의 자제의 그것 같아 보이는군요. 사실 저는 흑룡회 명단 속에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유명한 조선인들의 이름이 들어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는데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저 명단 속 조선인들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는지, 또 역사 속에서 어떤 길을 걸어갔는지에 대해 한 번 더 깊이 탐구해볼만 하다는 생각 또한 해보았습니다.





흑룡회 회원 명단을 정리하기는 했습니다만, 괜히 쓸데없는 짓을 해서 시간만 낭비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래도 비교적 긴 시간 동안 공력을 들여 정리한 명단인만큼 아무쪼록 쓰임을 얻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명단을 정리하면서 일본 근현대사 속 다양한 인물들을 만날 수 있었고, 또 일본어 인명 읽기 센스도 조금은 향상된 것 같아 참 좋았습니다. 명단 포스팅과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께도 그런 즐거움과 유익함이 돌아갔으면 좋겠습니다.


耿君 識

* 부기(2008/08/31): 여러 방문객들의 리플에 힘입어, 윤치오와 신순성에 대한 정보는 이미 명단 상에서 추가하였습니다. 정보 제공 감사합니다. 박진하의 경우 경찰간부로서 친일 인사 명단에 올라 있는 것은 알고 있으나 그외 자세한 정보를 알지 못해 조사중에 있습니다. 안상호와 민기호는 각각 추정되는 인물이 있으나 이름 한자가 다른 관계로 아직은 검토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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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耿君 | 2008/08/20 19:19 | 아시아에서 길을 잃다 | 트랙백 | 핑백(2) | 덧글(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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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꾀하였으며,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도 개입하였다. 이후 곤도 세이쿄, 다케다 한시 등과 함께, 현양사(玄洋社)의 해외공작 그룹에 해당하는 흑룡회를 1901년에 결성하였는데, 러시아를 몰아내고 흑룡강까지 진출하여 동아시아의 평화를 회복하겠다는 포부를 가진 우치다는 그 거창한 사업의 포석 중 하나로 한국과 일본의 '합방' ... more

Commented by 두막루 at 2008/08/20 20:11
흑룡회 명칭이 붙여진 계기가 꽤나 낭만적이었군요.;;

조선인 중에 윤치오라는 이름은 근현대사 교과서에서도 보았는데... 윤치호 일가가 아니었는지 모르겠네요.
Commented by 악질식민빠 at 2008/08/20 20:18
윤치호의 사촌입니다. 윤보선의 백부.
Commented by 두막루 at 2008/08/20 23:44
감사합니다. 윤치호 가문은 형제와 사촌형제들이 꽤 많더군요.--;
대부분이 한자리 한 자들이라는 것도...
Commented by 악질식민빠 at 2008/08/20 20:35
검색해보니 참여한 조선인들 의외로 유명(?)한 사람들이군요.
신순성(愼順晟) 은 대한제국 군함 양무호 함장.
Commented by 재팔 at 2008/08/20 20:50
구루시마는 c&c의 케인과 같은 존재였던 것입니다!(퍽!)
Commented by 耿君 at 2008/08/20 21:30
두막루님/ 낭만적이긴 하네요 ㅠㅠ 저도 윤씨 일가라고 생각은 했습니다. 그런데..
악질식민빠님/ 제가 제대로 찾아보지 못하고 그런 사람을 놓쳤군요 ㅠㅠ 코멘트 정말 감사합니다.
재팔님/ 헉!!
Commented by 악희惡戱 at 2008/08/20 21:55
사족들이 자유민권운동을 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네요.
뭔가 이미지가 안 맞는다는...-_-
아, 자유민권운동 하니까 료마가 간다에서 잠깐 봤던 이타가키 다이스케가 갑자기 떠오르는군요.
Commented by rumic71 at 2008/08/20 22:12
타이쇼 데모크라시라는 것도 요컨대 관점을 바꾸면 권력투쟁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는 거죠.
Commented by 耿君 at 2008/08/20 23:23
악희님/ 이타가키, 대표적인 자유민권운동가죠!!
자유민권 계열에서도 사족계열(사족민권)과 일반 평민 계열(농민민권)로 분류가 이루어진다지요.
rumic71님/ 뭐 그렇긴 하지만, 사족민권 계열 우익 분들은 폭력을 서슴치 않는다는게 좀-_-
Commented by 삐쭉뭉실 at 2008/08/20 23:37
이런거 조사하시면 위험한거 아닌가요? 왠지 위험한 느낌이 드는 이름의 단체네요. 해병대 모임 흑룡회는 관계 없겠죠?
Commented by Shaw at 2008/08/21 00:40
수고 많으셨습니다. @.@

흑룡회도 사실 *동* 식의 세탁을 거치면 "일본의 양심적인 순수 역사 연구 단체" 가 될 수 있지요.
Commented by 耿君 at 2008/08/21 08:39
삐죽뭉실님/ 저도 해병대 모임 이름이 흑룡회라는 거 보고 깜놀했습니다 ㅎㅎ 연관이 없겠지요??
Shaw님/ 수고는요 뭘. 넵 부여족의 영광!!
Commented by cms1530 at 2008/08/23 20:44
http://blog.naver.com/cms1530/10034338640

회원리스트를 엑셀로 만들어 봤습니다.
Commented by 耿君 at 2008/08/23 23:58
우왓 정말 감사합니다!
Commented by 나츠메 at 2008/08/26 02:53
그러고 보니, 구루시마는 현양사 조직원(?)이었지, 흑룡회는 아니었지요. 흠흠. 뭐 흑룡회에서 고인 추도의 의미로 삽입했을지도...... (먼산)
Commented by 耿君 at 2008/08/26 17:46
예 그 부분을 3번 케이스에 포함할 수 있겠지요.
Commented by 지나가다 at 2008/08/30 20:56
구글신은 위대 하네여
안상호 조선인 최초 의사 자격자에 전의
윤치오 친일 99명 안에 들고 장인은 중추원고문에 부인은 조선 최초의 양장입은 모던걸 더 무서운건 친가 쪽이 후덜덜 철종시절쯤의 안동김씨 족보 보는 느낌이 나네여
신순성 조선인 최초의 기선선장
박진하 고등경찰이라는데 정확한 직책을 모르겠네여
민기호 이름이 이상하네여 閔崎鎬에서 閔箕鎬 이름 바꾼것 갔네여 閔崎鎬 러일전전쟁 통역관참전훈포상 이후 완전이 사라지고 뜬금없이 閔崎鎬가 갑작기 나오고 九州日報03년 1월 10일짜번역자료에 전군부대신 민기호가 조씨일파로 망명중에 강연회 한다는데 번역본이라 어떤 한자인지 모르겠네여
Commented by 耿君 at 2008/08/31 08:56
윤치오, 신순성은 명단에 이미 수정하였습니다.
박진하에 대해서는 현재 더 조사중이며,
안상호와 민기호는 한자 이름이 달라서 동명이인일 수도 있을 것 같아 좀 대기중입니다.

정보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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